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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우재(小愚齋)

영주 뒷새 진주강씨 소우종택(榮州 뒷새 晉州姜氏 小愚宗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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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소우재(小愚齋)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24.0x55.0x2.7
  • 건물명 소우재(小愚齋)
  • 공간명 영주 뒷새 진주강씨 소우종택(榮州 뒷새 晉州姜氏 小愚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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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우재(小愚齋)

소우재(小愚齋)


소우재(小愚齋)는 영주 뒷새 진주강씨(晉州姜氏) 소우종택에 보관되어 있으며 소우(小愚) 강벽원(姜璧元, 1859~1941)이 학문을 강론하던 서재에 걸려 있는 편액이다. ‘소우’의 의미에 대해서는 그가 지은 「소우재명小愚齋銘」에서 “나는 태어나면서 너무 우직하여 스스로 소우(小愚)라고 불렀다. 그러나 지금 노인이 되었음에도 더욱 우직하여 장차 조금 덜 우직하도록 함에 바랄 것이 없다. [余生而大愚 自呼曰小愚 今老而益愚 將無望於小之也]”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이는 또 공자가 『논어』, 「선진先進」에서 제자들의 특성을 평가함에 있어 “고시(高柴)는 우직하다. [柴也愚]”라고 평하였다. 한편 『공자가어孔子家語』에서는 고시의 우직함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발로는 그림자를 밟지 않았으며, 땅속에서 막 나온 벌레를 죽이지 않았으며, 한창 자라나는 초목을 꺾지 않았으며,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삼 년 동안 피눈물을 흘리면서 한 번도 이를 드러내어 웃은 적이 없었으며, 피난길에도 지름길로 가거나 개구멍으로 다니지 않았다. [足不履影 啓蟄不殺 方長不折 執親之喪 泣血三年 未嘗見齒 避難而行 不徑不竇]”라고 하였다. 고시(高柴)는 공자의 제자로 자(字)가 자고(子羔)인데 성품이 우직하고 후덕하였다. 강벽원은 자신의 평소 행실이 공자의 제자 고시처럼 너무 우직하기 때문에 이를 조금이라도 개선하고자 당호로 삼은 것이다. 편액의 글씨는 강벽원의 친필 해서체로 전해진다.

맷집 좋은 덩치를 만난 듯 우직한 맛에 한눈에 봐도 명품이다. 당시 모범적 자형과도 다른 파격이라 할 만하다. 묵직한 필획은 골격과 근육이 충만하고 시작과 마무리에 구분이 없다. 한 획은 한 글자를 결정하고 한 글자는 전체의 콘셉트를 좌우한다고 한다. 먼저 쓴 小 자 한자가 愚자를 이와 같이 쓰게 하였다. 작게 쓴 小에 대응한 愚자의 장쾌함은 이 편액의 백미다. 齋자는 愚보다 키를 살짝 낮춰서 자연스런 관계로 이어갔다. 이미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친히 밝힌 편액을 어리석게 쓴다는데 무슨 거리낌이 있겠는가? 가슴이 탁 트이는 맛은 이런 생각 때문인 듯하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영주 뒷새 진주강씨 소우종택(榮州 뒷새 晉州姜氏 小愚宗宅) 소개


강벽원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윤화(允和), 호는 소우(小愚)‧노정(蘆亭)‧두고산인(斗皐山人)‧만학당(晩學堂) 등이다. 강벽원은 경상북도 영주시 두서면 출신으로 시와 그림과 글씨에 모두 능했는데 특히 글씨를 잘 썼다. 아버지는 강복영(姜福永, 1832∼1895)이고,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12~13세 무렵에 수산(睡山) 김휘철(金輝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뒤에 다시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서 공부하며 퇴계학맥을 계승하였던 선비이다. 풍채와 기개가 뛰어나며 호탕하고 굳세면서도 너그러운 품성의 소유자였다. 일찍이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 어느 외진 곳에서 무뢰배 4∼50명이 한 여자를 잡아 옷을 벗겨 말목에 붙들어 매놓고 칼을 갈고 있었다. 일행이 모두 실색하였으나 소우가 앞으로 다가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반드시 쓰일 데가 있을 텐데 어찌 한 여자로 하여금 악명을 얻으려 하는가라고 꾸짖고 타이르니 물러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종형 강회원(姜會元)이 1876년 38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유학을 하고 있던 때 강벽원을 데리고 함께 상경한 적이 있었다. 이때 관상을 잘 본다는 중국 사람이 “무인의 기상을 지니고 있는지라, 무예를 익히면 크게 출세하겠으나 글공부만으로는 큰 운수를 기대할 수 없으리라.”라고 함에 강벽원이 답하길 “나는 선비의 길을 배웠는데 출세를 위하여 업을 바꾼다면 선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또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의병이 일어났을 때 종형 강회원이 의병소의 재정을 맡은 것에 연좌되어 회원의 아들 강익희(姜翊熙)가 관군에게 붙잡힌 적이 있었다. 이에 소우가 “익희는 이 시대에 남아있는 선비요, 하물며 우리 집안 종손이라. 죽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고 하며 위험을 무릅쓰고 관군의 막사로 가서 두어 달 만에 구하였다.

강벽원의 서예예술은 중국에까지 전파되어 금문학파의 거두인 강유위(康有爲)가 그의 글씨를 보고 “안진경과 미불의 서법을 얻었으니 당대 천하제일의 솜씨”라고 격찬하기도 하였다. 시와 그림, 글씨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로 불렸으며 추사체 기풍의 글씨와 더불어 그림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1885년(고종 22)경에는 운현궁을 드나들었다는데 이때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으로부터 난을 치는 것을 배웠다는 설이 전해진다. 이론에도 밝아 서법이론서인 『노정서결蘆亭書訣』, 『오우집화五友集話』, 『소우재유고小愚齋遺稿』 등 여러 권의 저서를 남긴 문인이었지만 벼슬과는 인연을 맺지 못하고 산천을 유람하며 자유롭게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사계서당을 짓고 후진 양성과 선비로서의 초연한 삶을 살았다. 특히 『노정서결』은 일종의 학서(學書) 이론서이자 연서교본의 성격을 띠고 있는 책으로 모두 2권으로 구성된 목판본이다. 『소우재유고』는 4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첫머리에 ‘마음이 바르면 글씨가 바르다’라는 뜻의 심정즉필정(心正則筆正)이라는 강벽원의 글씨가 있고,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의 문집 서문, 인암(忍庵) 권상규(權相圭)가 찬한 「묘갈명墓碣銘」, 김승학(金承學)이 찬한 「묘지명墓誌銘」이 있다. 그리고 권1, 2에는 시가 실려 있다. 시는 함께 자연경관을 유람하며 감흥을 읊은 시들이 많이 보인다. 권 3은 서(書), 권 4에는 서(書)와 서(序), 기(記), 지(識)‧발(跋), 제문(祭文), 명(銘)‧찬(贊)‧송(頌)이 실려 있다.

참고문헌
  • 『논어』
  • 『공자가어』
  • 『소우재유고』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
  • 김상년, 「소우 강벽원의 서예 연구」, 석사학위논문,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