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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헌(海月軒)

평해황씨 해월종택(平海黃氏 海月宗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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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해월헌(海月軒)
  • 글자체 행서(行書)
  • 크기 44.0x137.0x4.5
  • 건물명 해월헌(海月軒)
  • 공간명 평해황씨 해월종택(平海黃氏 海月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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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헌(海月軒)

해월헌(海月軒)


해월헌(海月軒)은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에 있는 평해황씨(平海黃氏) 해월종택(海月宗宅)인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 1556~1622)의 별당 편액이다. 황여일은 1618년(광해군 10)에 동래부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의 별당 이름을 해월헌에서 만귀헌(晩歸軒)으로 고쳤기 때문에 해월헌과 만귀헌은 같은 건물이다.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1539~1609)의 「해월헌기海月軒記」에 따르면 ‘해월’은 거센 파도에도 가득차거나 줄어든 적이 없는 바다와 차고 기울면서도 끝내 본체에는 결손이 없는 달의 본성을 취해 명명하였다. 여기에는 영원히 변치 않는 광대한 바다와 예부터 식견이 높고 사물에 밝은 의미로 비유한 달을 군자의 마음이라 여기며 이를 보존하여 군자의 학문에 힘쓰기 위한 뜻이 담겨 있다. 편액의 글씨는 행서로, 아계 이산해의 친필로 전해진다.

바닷가에 자리 잡은 별당의 편액에 海月軒이라 쓴 글귀가 잘 어울린다. 힘찬 파도가 몰아치는 듯 기세가 등등하다. 힘찬 필세에 한껏 흥을 탄 감정은 月자에서 절정을 맛본 후 마지막 軒자에서 차분하게 마무리 되었다. 발산하는 기세인 海月은 언제라도 세상 밖으로 뛰쳐나갈 듯 하고 절제하고 있는 軒자는 조용히 이를 말린다. 절제와 발산이 넘칠 듯 말 듯 묘하게 대응하고 있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평해황씨 해월종택(平海黃氏 海月宗宅) 소개


평해황씨의 원시조는 후한의 황락(黃洛)으로, 교지국(交趾國, 지금의 베트남)으로 가던 중에 풍랑을 만나 경북 울진군 평해에 표착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황여일의 중시조는 고려 충렬왕 때 첨의평리를 지낸 황서(黃瑞)인데, 그가 익대의 공으로 평해를 승격시켰고, 이후 자손들이 세거하면서 명문가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대대로 관직이 이어졌는데, 황여일의 고조부 황옥숭(黃玉崇)은 한성판관을 지냈으며, 조부 황우(黃瑀)는 성주목사를 역임하였고, 부친 황응징(黃應澄)은 장례원판결사에 추증되었다.

이후 황여일의 중부 대해 황응청은 1594년(선조 27)에 진보현감에 부임한 것을 제외하고는 고향에 은거하여 특별한 스승 없이 송나라의 주돈이와 정호·정이 형제의 학문을 자득했고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을 사숙했으며 월천 조목과 도의지교를 맺었다.

황여일의 맏아들 동명(東溟) 황중윤(黃中允, 1577~1648)은 1612년(광해군 4)에 문과에 급제한 뒤에 사간원 정언·동부승지·우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정언으로 재직할 때 인목대비에게 효를 다해야 한다는 소를 올렸다가 광해군의 분노를 사 벼슬에서 쫓겨난다. 명·청 교체기의 긴박한 국제 정세 속에서 기미책(羈縻策)을 주장했다가 빌미가 되어 주화론자로 몰려 10년간 해남에 유배되었다. 요컨대, 평해황씨 해월 집안은 황응청·황여일·황중윤의 대에 와서 뛰어난 문장과 외교력으로 국난극복에 누구보다 앞장섰고, 또 평해를 중심으로 하는 동해안 지역에 퇴계학을 정착시키고 이를 전파하는 데 있어 매우 선도자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퇴계학맥의 중요한 가문으로 자리매김하였다.

황여일의 자는 회원(會元), 호는 해월(海月)·만귀헌(晩歸軒), 본관은 평해(平海)이며, 부친은 장예원판결사 응징(應澄), 모친은 영덕정씨(盈德鄭氏) 정창국(鄭昌國)의 딸이다. 1556년(명종 11) 10월 21일에 평해 사동에서 태어났다. 8세부터 중부인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 1524~1605)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9년(선조 2) 간성(杆城) 향시에서 1등을 하였다. 당시 강릉 지방관이던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해월의 시제시를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 1575년(선조 8)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의 사위가 되었고, 그해 가을에 안동 향시에서 「치술령부鵄述嶺賦」로 장원을 차지하였다. 이 날의 일은 후에 두고두고 사람들에게 회자되었으며, 그 일화는 이렇다. 과거장에서 모두 붓을 들고 글을 짓느라 여념이 없는데 반해 황여일은 조는 듯이 앉아 있다가 끝나기 직전에 일필휘지로 「치술령부」를 지어 올리고 나가 버렸다. 시관들이 그 글을 보고 크게 놀라워하며 장원으로 발탁해 명성을 떨쳤다.

1583년(선조 16)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을 배알하고 성리학을 공부하여 크게 성취하였으며, 1585년(선조 18)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형조정랑, 사헌부장령, 동래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586년(선조 19) 2월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을 배알하였고, 안동 예안에서 퇴계 이황의 유고를 편집하였다. 1588년(선조 21) 울진 사동리 마악산 아래 동해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 해월헌을 세웠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덕원부(지금의 함경남도 원산)에서 영흥부(지금의 함경남도 영흥)까지 호위하며 따라갔고, 중호(重湖) 윤탁연(尹卓然)의 종사관이 되어 전공을 세웠다. 1598년(선조 31) 10월 진주사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정응태(丁應泰)의 무국(誣國)을 변무하였다. 당시 정응태는 명나라 신종에게 “조선이 왜병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침범하려 한다.”고 무고했었다. 1606년(선조 39)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과 양유년(梁有年)이 조선에 왔을 때 문학에 뛰어난 선비에 선발되어 한강에서 사신 일행을 접대하였다. 1618년(광해군 10)에 동래부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의 별당 이름을 ‘해월헌(海月軒)’에서 ‘만귀헌’으로 고쳤다. 1622년(광해군 14) 4월 2일에 세상을 떠났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61호인 해월헌은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에 있는 사동초등학교 동편 골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 1588년(선조 21)에 사동리 마악산 아래 동해 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곳에 건립하였으나 19세기 중엽에 후손들이 현 종택 내로 옮겼다. 건물은 뒤편의 야산을 등지고 앞쪽으로는 안뜰을 향해 정침·해월헌·사당이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1993년에 복원된 대문간 채를 들어서면 넓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침과 해월헌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으며, 그 뒤에는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해월헌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팔작지붕을 이었으며, 전면에는 누마루처럼 꾸민 툇마루를 두고 난간을 돌렸다. 평면은 가운데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양측간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이다. 정침은 정면 7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로 전면 양측으로 1칸씩 돌출되어 양날개집의 형상을 하고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안마당 뒤로 3칸 규모의 대칭을 두었다. 대청 좌우에는 안방과 상방을 두었으며, 안방과 상방의 전면에는 익사가 연접되어 있다. 동해안 지역 상류주택 특성을 잘 보여준다. 한편 해월헌에는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 약포(藥圃) 정탁(鄭琢),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 등 당대 일류 문사들의 시판이 게시되어 있어 해월헌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참고문헌
  • 이산해李山海, 「해월헌기海月軒記」, 『아계유고鵝溪遺稿』 권3.
  • 황여일黃汝一, 「행장行狀」, 『해월집海月集』 권14.
  • 황여일, 「해월집서」, 『해월집』 권1.
  • 유교넷, 유적인물지도(ugyo.net/cf/frm/tuFrm.jsp?CODE1=02&CODE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