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암(近庵)
근암(近庵)은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에 위치한 근암(近庵) 류치덕(柳致德, 1823~1881)의 서재 편액이다. 그가 지은 「근암소설近庵小說」에 “집 가까이 십 여 걸음쯤에 서재 3칸을 지어놓고 ‘근암’이라 편액 하였으며, 뜻도 깊지 않고 얕다. 그 땅이 가깝고 그 생각이 가깝고 그 마음먹음과 행동 또한 평이하고 흔히 주위에서 볼 수 있는 것에 불과하므로 근암을 내 거처로 삼은 것이 마땅하다. 앞에는 밝은 창이 있고 오른쪽에는 책상이 있으며, 눈앞에는 늘 절실하고 가깝지 않은 것이 없고 항상 근본을 중시해야 한다는 정자(程子)의 가르침을 생각하며, 낮고 가까운 곳으로부터 하며 안으로 채찍질한다면 ‘근암’이라 명명한 것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라며 근암이라고 편액한 이유에 대해서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편액의 글씨는 흥선대원군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친필이다.
전주류씨 근암고택(全州柳氏 近庵古宅) 소개
류치덕의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치숙(致淑), 자는 도준(道峻), 호는 근암(近庵)이다. 아버지는 혼문(渾文)이며, 어머니는 영양남씨(英陽南氏) 남경묵(南景默)의 딸이다. 처음에는 큰할아버지인 대야(大埜) 류건휴(柳健休)에게 배웠으나, 류건휴가 죽자 족형인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남들보다 일찍 나아가 공부하고 매사에 충실하여 류치명의 총애를 받았으며, 신암(信庵) 이병하(李秉夏)와 세산(洗山) 류지호(柳止鎬)와 함께 공부하면서 의심나는 부분이 있으면 스승 류치명에게 나아가 뜻을 분명하게 하였다. 류치명이 1855년에 사도세자의 추존을 청하는 소를 올렸다가 탄핵을 받아 전라도 지도로 유배를 갔다. 이때 항상 걱정하면서 사사로운 모임에 나가지 않았으며 의심나는 부분은 편지로 질의하였다. 이에 류치명은 답장을 보내어 “성인의 도를 전하는 한 줄기 소리가 근암 때문에 사라지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문중일에도 참여하였는데 『대야문집』 교정과 전주류씨(全州柳氏) 무실파 세보인 『임신보壬申譜』(1872)를 간행하는데 진력하였으며, 1873년 친상을 당하자 외보일은 사절하고 학문에 더욱 매진하였다. 특히 이기사칠지설(理氣四七之說)과 태극동정지기(太極動靜之機)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여 나름대로 일가견을 확립하였다. 그 밖에도 백가서(百家書)를 널리 통독하였으며 특히 중국의 고증학 및 신학문에 대하여서도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던 듯하다. 또 예학(禮學)에도 밝아 역대 예지와 국조전헌(國朝典憲)을 수집하여 『전례고증典禮攷證』 12책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은 정확하고 정밀한 교감(校勘)과 상세한 절목, 풍부하고 다양한 예증으로 우리나라 예학연구에 필수자료이기도 하다. 그는 유학 전반에 걸친 문제점을 거시적인 안목으로 비판하였고, 조선 후기의 누적된 모순을 노출하는 제반 현상, 즉 모든 제도상의 문제점과 모순을 총체적인 안목에서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궁극적으로 유학의 범주 안에서 제반 가치의 재정립과 창조적인 적용을 시도하여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로 보아 그는 실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저서로는 『전례고증典禮攷證』 12책과 『근암문집近庵文集』 6권이 있다. 『근암문집』 중 서(書)에는 주로 스승과 친구, 제자들과 학문상의 문제점을 질의‧토론한 내용이 실려 있고, 잡저(雜著)의 「만록謾錄」은 이기사칠론(理氣四七論)과 태극동정지기(太極動靜之機)를 깊이 있게 논변한 것이다. 특히 「임려문답林廬問答」은 문집 전체의 절반에 해당하는 분량이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학문상의 문제뿐 아니라 정치‧경제‧문화 등 여러 제도상의 모순점을 선유들의 학설을 참고하여 날카롭게 논박하는 한편 새로운 방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토지제도, 구황정책에 있어서의 곡가안정, 조세제도, 관제의 모순, 병제·교육기관과 제도 등에 대해서도 자세히 다루고 있어 류치덕의 진보적이고 거시적인 안목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필사본에는 ‘임려사문(林廬私問)’으로 되어있으나 문집으로 간행하면서 ‘임려문답’으로 수정되었다.전주류씨 무실파는 시조 류습(柳濕)의 후손으로, 6세손 류윤선(柳潤善, 1500~1557)이 세거지인 서울 묵사동에서 처가인 영주로 이거하였고, 장남 류성(柳城, 1533~1560)이 안동 천전리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사위가 되면서 영주에서 무실로 이거하여 이곳에 터전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조선 후기까지 학문‧덕행‧충효 등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문집을 남긴 인물만 120여 명에 이른다. 불천위(不遷位)가 5명(백졸암 류직, 용와 류승현, 삼산 류정원, 호고와 류휘문, 정재 류치명), 문과급제자가 10명, 무과급제자가 5명, 생원진사 33명, 음사로 벼슬한 인물이 39명이었다. 특히 류경시(柳敬時)와 류승현(柳升鉉)은 청백리에 선정되었고 류관현과 류정원은 『목민심서』에 수록될 만큼 치적이 있었다. 류성은 류복기(柳復起)와 류복립(柳復立) 두 아들을 두었는데, 류복기는 학봉 김성일과 함께 진주성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순국하였다. 류복기는 우잠(友潛)‧득잠(得潛)‧지잠(知潛)‧수잠(守潛)‧의잠(宜潛)‧희잠(希潛)‧시잠(時潛) 등 일곱 아들을 두었는데, 류치덕은 류지잠의 후손이다. 이후 4세를 지나 류화현(柳和鉉, 1712~1782)은 자가 해백(楷伯), 호가 송음(松陰)인데 족형 류관현에게 수학하였으며 천문‧지리‧복서‧산수 등에 널리 통하였다. 류화현의 아들 류충원(柳忠源, 1742~1829)은 은둔하면서 장남인 대야(大埜) 류건휴(柳健休)와 차남 류소휴(柳韶休)의 교육에 힘썼다. 류소휴는 아들이 없자 류정휴(柳挺休)의 아들 한수당(閒睡堂) 류혼문(柳渾文, 1802~1873)으로 대를 이었다.근암고택은 1870년에 건축한 집으로, 원래는 안동시 임동면 한들[大坪]에 있었으나 1987년 임하댐 건설로 지금의 자리로 이건하였고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5호로 지정되어 있다. 오른편 담장 사이에 난 사주문을 들어서면 사랑마당이 나타나는데, 마당의 오른편에 정자인 근암정이 있고, 그 옆에 정침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정침은 정면 6칸, 측면 4칸 반 크기의 ㅁ자형 건물이다. 중문간의 오른편에는 사랑채를 꾸몄는데, 사랑채와 안채가 한 몸을 이룬 ㅁ자형의 주택에서 사랑채의 지붕은 일반적으로 팔작지붕을 형성하는 데 비해 이 집은 사랑채의 지붕을 맞배지붕으로 구성하였다.
참고문헌- 柳致德, 「近庵小說」, 『近庵文集』 卷2.
-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구미문화전자대전
- 안동민속박물관, 『安東의 懸板』Ⅰ, Ⅱ, 2009.
- 한국국학진흥원자료부, 『전주류씨 근암고택』, 한국국학진흥원소장 국학자료목록집 37, 2016.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 Ⅱ, 2015.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