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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청정(挹淸亭)

광산김씨 후조당종가(光山金氏 後彫堂宗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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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읍청정(挹淸亭)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55.5x100.5x8
  • 건물명 읍청정(挹淸亭)
  • 공간명 광산김씨 후조당종가(光山金氏 後彫堂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예안 오천동-와룡면 군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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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청정(挹淸亭)

읍청정(挹淸亭)


읍청정(挹淸亭)은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에 있는 김부의(金富儀, 1525~1582)의 정자 편액이다. ‘읍청정’이란 청량산을 바라보며 마음의 티끌을 씻어낸다는 뜻이다. 또 이 건물이 예전 오천의 안산 기슭에 있을 때 청량산을 향해 서 있었는데, 마치 청량산[淸]을 끌어당기는[挹] 모습과 같다 해서 나온 의미이다. 또 이황이 제자 김부의에게 호로 지어준 것이기도 하다. 이 정자의 원래 이름은 자신 안에 하늘과 땅이 있다는 의미로 건곤정(乾坤亭)이었으나, 김부의가 읍청정으로 고쳤다. 그 전에 어떤 사람이 김부의에게 정자를 납량정(納凉亭)이라 부르자고 했는데, 이 명칭 또한 청량산을 바라보기 때문에 지어졌다. 정자의 내부에는 이황이 써 준 ‘김신중읍청정십이영(金愼仲挹淸亭十二詠)’이 지금까지 걸려 있다. 광산김씨(光山金氏)의 유적들이 모여 있는 오천유적지 내에 위치하는데, 원래는 낙동강에 인접한 오천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인해 1974년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편액의 글씨는 이황이 직접 쓴 해서체이다.

맑음(淸)은 비움(虛)에 있다.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心齋) 일은 비워내는(虛) 것이다. 그 ‘맑음을 잡겠다’(挹淸)는 글귀로 당호를 만들었다. 어찌 맑은 바람과 맑은 물 뿐이겠는가? 세월이 갈수록 걸어둔 당호 읍청정(挹淸亭)은 의연하되 주인은 늙어 노년이 될 것이다. 정말 어려운 일은 노년의 맑음을 유지함이다. 그 즈음에 더 빛나는 당호글귀가 아니겠는가? 내가 글씨에서 마지막 하나를 잡고자 한다면 그것은 맑음(淸)이다. 필획이 굳세고 구성이 참신해도 다 맑음(淸) 이후에 가능한 일이다. 필획의 맑음은 동작의 비움(간결함)에 있고, 행간의 맑음은 흉중에 담았다가 흘러넘치는 것이라 한다. 편액의 글씨가 후덕하고 넉넉하다. 바라보고 있으면 맑은 정신을 연상하기에 충분하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광산김씨 후조당종가(光山金氏 後彫堂宗宅) 소개


읍청정이 위치한 오천리는 구한말 예안군 읍내면 지역으로 외내, 오천(烏川)이라 하였다. 외내는 마을 앞을 흐르는 시내가 ‘한줄기로 맑은 개울’이었다는 의미이다. 혹은 물이 맑을 때 물 밑에 깔린 돌을 멀리서 보면 검게 보인다고 하여 오천이라 한다. 1914년 무양동 일부와 안동군 북선면의 외감애동 일부, 동후면의 나소곡리 일부를 병합하여 오천동·오천리라 하여 예안면에 편입되었다가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오천리는 3개 리로 구분되어 있다. 오천 1리는 군자리와 방잠의 일부, 오천 2리는 조마리, 이사, 우무실마을이고, 오천 3리는 양정, 신역, 당고개, 지삼마을로 되어 있다. 군자리는 근래에 조성된 광산김씨오천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광산김씨 예안파의 600년 전통 마을이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자 2km 위인 현 위치로 종택, 묘우, 정자, 강당 등의 중요 건물들만 이건하였다.

광산김씨는 원래 전라도 광산에서 고려 후기에 중앙에 진출하였는데, 그 한 파가 경상도 안동으로 와서 풍천의 구담, 와룡의 가구, 예안의 오천 등 세 곳에 뿌리를 내렸다. 오천의 입향 시조는 농수(聾叟) 김효로(金孝盧, 1454~1534)로 풍산 도양골에 살다가 연산군 때 이곳으로 옮겨 정착하였다. 그의 아들 운암(雲巖) 김연(金緣, 1487~1544)과 탁청정(濯淸亭) 김유(金綏, 1491~1555)는 중종 때 명신으로 가문이 융성해지는 데 기틀을 마련하였다. 군자리로 불리게 된 것은 안동부사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가 “오천마을은 주민들 모두가 군자 아닌 사람이 없구나.”라고 말한 데서 유래하였다. 특히 오천칠군자는 김연의 아들인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 읍청정(挹淸亭) 김부의(金富儀), 김유의 아들인 산남(山南) 김부인(金富仁), 양정당(養正堂) 김부신(金富信),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 김효로의 외손인 봉화금씨(奉化琴氏) 일휴당(日休堂) 금응협(琴應夾), 면진재(勉進齋) 금응훈(琴應壎) 등의 7인을 가리키는 말로, 모두 김효로의 친손과 외손들이다.

읍청정의 주인 김부의(金富儀, 1525~1582)는 자는 신중(愼仲), 호는 읍청정(挹淸亭)이다. 김연의 둘째 아들이고 김부필의 아우이다. 이황에게 수학하여 경술과 도학으로 이름이 났는데, 동문인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은 그를 제일류(第一流)로 인정하였다. 김부의는 유일(遺逸)로 추앙을 받아 참봉에 추천이 되었지만 부임하지는 않았고, 1555년(명종 10)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역학에도 밝아 이덕홍(李德弘)이 선기옥형(璿璣玉衡)을 제작했는데, 도수(度數)가 맞지 않아 돌아가지 않자 이황이 김부의에게 다시 제작하게 했던 일화가 전해진다. 김부의는 역동서원을 창건하는 데 큰 활약을 하였고, 이황이 산장(山長)을 맡게 해 선비를 양성하도록 하였다. 김부의는 성품이 매우 검소하여 50세가 넘어서도 비단옷을 입지 않았으며 자제들이 좋은 옷을 입는 것을 보면 “너희 할아버지께선 재상의 지위에 계셨으면서도 무명옷을 즐겨 입으셨는데 너희들은 한사(寒士)인 주제에 좋은 옷만 입으려 하니 도리가 아니다.”라며 타일렀다. 부인은 안동권씨(安東權氏) 권습(權習)의 딸이다. 아들은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 1555~1593)이다. 김부의의 문집 『읍청정유고挹淸亭遺稿』는 『오천세고烏川世稿』 안에 실려 있는데, 불분권 1권의 얇은 문집으로 주로 시가 많은 편이고 소수의 편지, 묘지명이나 묘갈명 약간, 그리고 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읍청정은 150cm 정도의 기단 위에 조성된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겹처마 팔작기와지붕집이다. 공간 구성은 정자마루 2칸을 가운데 두고 그 좌우에 1칸 크기와 1칸 반 크기의 온돌방을 꾸몄으며, 좌측 방과 마루 앞에는 툇마루 3칸을 놓았다. 정자마루는 우물마루를 깔고 천장을 연등천장으로 꾸몄다. 마루의 전면에는 들어열개띠살 4분합문을 달아 필요시에 들어 올려 2개의 들쇠로 고정시킬 수 있다. 전면과 측면에는 툇마루와 쪽마루로 구성하였고, 건물 전면의 툇마루와 쪽마루는 청판에 풍혈이 있는 계자각 난간을 둘렀다.

참고문헌
  • 안동민속박물관, 『안동의 명현당호』, 안동민속박물관, 2000.
  • 안동민속박물관, 『안동의 현판』, 안동민속박물관, 2004.
  • 권오영, 「오천 7군자의 학문활동과 사상」, 『국학연구』 제30집, 한국국학진흥원,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