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 편액
  • 공간별 보기

긍재(兢齋)

봉화 법전 진주강씨 해은공파(奉化 法田 晉州姜氏 海隱公派)

32.0x63.5x3.4 / 전서(篆書)MORE

의견달기 URL
목록 이전 기사 다음 기사
  • 자료명 긍재(兢齋)
  • 글자체 전서(篆書)
  • 크기 32.0x63.5x3.4
  • 건물명 긍재(兢齋)
  • 공간명 봉화 법전 진주강씨 해은공파(奉化 法田 晉州姜氏 海隱公派)
  • 서예가
  • 위치정보 봉화군 법전면 법계
  •  
r0019_1.jpg
긍재(兢齋)

긍재(兢齋)


긍재(兢齋)는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의 진주강씨(晉州姜氏) 해은공파 문중에서 소장하던 편액이다. 해은(海恩) 강필효(姜必孝)의 구택인 해은구려(海恩舊廬)에 걸려 있었으며, 긍재는 강인원(姜麟元, 1858~1922)의 당호이자 그의 호이다. 이는 『논어』, 「태백泰伯」에서 만년에 병이 든 증자(曾子)가 제자들을 불러 말하기를 “나의 발을 열며 나의 손을 열어보라. 『시경』에서 말하기를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깊은 연못에 임한 듯이 얇은 얼음을 밟는 듯이 하라.’ 하였으니 지금 이후에야 내가 면할 수 있음을 알겠구나, 제자들이여. [啓予足 啓予手 詩云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 而今而後 吾知免夫 小子]”라고 한 데서 취한 말이다. 강인원의 친구이자 처남인 동전(東田) 이중균(李中均, 1861~1933)이 지은 「긍재기兢齋記」에 의하면 강인원이 긍재를 건립한 시기는 강인원의 나이 57세 때인 1914년이고, 그는 고조부인 해은 강필효의 가르침을 몸에 지니며 행실을 삼갔다. 특히 강필효가 그의 제자인 과재(果齋) 성근묵(成近黙)을 전송하면서 지은 시 “그대에게 평생의 일을 정성스레 말하노니, 남은 세월 아끼면서 긍업의 공부에 힘쓰게. [慇懃說與平生事 惜取餘光兢業工]”를 근거로 강인원이 고조부의 당부를 그대로 실천하고자 당호를 긍재라 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강인원은 자제들 가르침에 정성을 다하면서 교만과 사치, 나태함과 방탕함을 경계시켰다. 편액의 글씨는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이 쓴 예서체(隷書體)이다.

전형적인 후한 예서 두 글자로 쓴 편액이다. 품이 넉넉하고 균제미가 있다. 해서가 측면에서 본 형세라면 예서는 정면에서 본 형세다. 횡획이 반듯하게 수평을 이루고 파책이 약간의 장식을 한다. 기필은 모가 난 방필(方筆)을 정확히 구사하여 방경고졸(方勁古拙)이라는 예서의 참모습을 구현하고 있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봉화 법전 진주강씨 해은공파(奉化 法田 晉州姜氏 海隱公派) 소개


강인원(姜麟元)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주약(周若), 호는 긍재(兢齋)이다. 조선 후기 학자로 해은(海恩) 강필효(姜必孝)의 고손자이자 강제(姜濟)의 둘째 아들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음직으로 의령참봉을 지냈다. 이중균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제문에 “온순하면서 근신함으로써 행실을 제약하여 부모에게 효도하고 윗사람을 공경함을 근본으로 하였고 총명한 재주에 문학을 겸하였으며, 어버이를 봉양함에 부드러운 얼굴빛을 띠었고 형을 섬김에 화락한 마음을 지녔다. 그리고 수약(守約)함에 텅 빈 듯하며 처신함에 어리석은 듯하였으나 구차하게 남과 색다름을 구하지 않았고 구차하게 속된 것과 함께 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진주강씨 법전 문중의 세거지인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은 문수산과 태백산을 끼고 있는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안동부 춘양현에 편입되었다가 순흥부에 속하기도 하였다. 진주강씨가 법전에 터전을 마련하게 된 계기는 한산군수를 역임한 강덕서(姜德瑞, 1540~1614)의 후손인 강윤조(姜胤祖, 1568~1643)와 그의 두 아들 잠은(潛隱) 강흡(姜恰)과 도은(陶隱) 강각(姜恪)이 병자호란의 화를 피하기 위해 법전리로 입향하면서부터이다. 강흡과 강각은 부모님을 모시고 1636년(인조 14) 12월 파주 교하에서 출발하여 1637년(인조 15) 1월 매창(梅窓) 정사신(鄭士信)의 조카사위인 권산기(權山起)의 시골 농장이 있는 법전리 성재미[성잠星岑]에 우거(寓居)하였다. 법전 진주강씨는 음지마을과 양지마을로 나뉘어 마을의 토대를 형성했는데, 양지마을에는 주로 소론으로 활동했던 강각의 후손들이 거주하였고, 음지마을에는 노론의 당색을 띠었던 강흡의 후손들이 거주하면서 명실상부한 진주강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양지마을에는 도은구택과 해은구택 등이 있으며, 음지마을에는 기헌고택과 경체정 등이 있다.

법전은 괴리 또는 유천이라고 하는데, 법전이라는 지명은 법흥사라는 사찰 앞에 있던 큰 밭을 지칭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으나 법전천의 옛 이름인 유계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즉 유(柳)자의 훈인 ‘버들’이 ‘법(法)’으로 변해 법계(法溪), 법전천(法田川)으로 변했다는 설명이다. 강흡과 강각 형제는 병자호란 이후에도 숭명배청의 대명의리를 실천하기 위하여 파주로 돌아가지 않고 법전에 정착하였다. 이들 형제는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 포옹(抱翁) 정양(鄭瀁), 각금당(覺今堂) 심장세(沈長世), 손우당(遜憂堂) 홍석(洪錫) 등과 함께 태백오현(太白五賢)으로 칭송되어 숭정처사(崇禎處士)로도 불렸다. 또한 강각은 태백오현에 더하여 태백육은(太白六隱)으로 일컬어졌고, 중국 동진 때의 시인 도잠 도연명의 ‘도(陶)’를 따서 ‘도은(陶隱)’이라 자호하였다. 남송을 인정하지 않아 조정에 출사하지 않은 채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어 놓고 은거했다는 도연명의 이야기는 버드나무를 신하의 충절에 빗대는 전통을 낳았다. 따라서 입향조인 강흡과 강각 형제가 견지했던 숭명배청의 의리가 도연명의 고사와 상통하여 법전천의 어원인 유계의 탄생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법전마을은 태백산을 향해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인 비룡승천형의 풍수지리학적 특성을 보인다. 여기에 법전면 풍정리와 봉성면 창평리 사이에 있는 갈방산과 가마봉이라는 두 개의 문필봉을 끼고 있어 문과 급제자 25명(음지마을 13명, 양지마을 12명), 무과 급제자 2명, 소과 합격자 31명과 고시 합격자 13명, 그리고 박사와 학자들을 대거 배출하여 영남의 명문가로서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참고문헌
  • 강필효, 「성성사(근묵)천리명가 방여궁적 조여량적 위희양심 내회화산당 구점일절이상돈成聖思(近默)千里命駕 訪余竆寂 阻餘良覿 慰喜良深 乃會話山堂 口占一絶以相敦」, 『해은수고海恩遺稿』 권1.
  • 진주강씨 법전문중 응교공 종회, 『진주강씨 법전문중지』, 2015.
  • 한국국학진흥원자료부, 『진주강씨 법전문중 도은종택 및 석당공』,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국학자료목록집 41,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