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재(敬齋)
경재(敬齋)는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 음지마을에 있는 송월재(松月齋)종택에 걸려 있는 편액이다. ‘경(敬)’은 내면의 흔들림을 털어내는 수양법으로 주자는 “마음에 하나의 편견도 없으면서도 항상 경각 상태로 있으며 어디든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상태[主一無適]”라고 설명하였다. 마음이 욕심에 의해 무너지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이로 인하여 사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되니 경의 상태를 유지하여 자신을 가다듬을 것을 강조한 말이다. 편액의 글씨는 소우(小愚) 강벽원(姜璧元)의 친필이다.
봉화 전주이씨 송월재종택(奉化 全州李氏 松月齋宗宅) 소개
봉화 전주이씨(全州李氏) 송월재종택은 태종대왕의 별자(別子, 제삼서자第三庶子 신빈신씨信嬪辛氏 소생)인 온녕군 정(程)의 후손이다. 온녕군은 아들이 없어서 아우인 근녕군 농(襛)의 아들인 우산군 종(踵)을 양자로 들여 여섯 아들을 두었다. 우산군의 여섯 아들은 모두가 당대의 명류들이었지만, 연산군 때 뜻밖의 화를 당하여 재산을 몰수당하고 결국에는 7부자가 같은 날 죽음을 맞았다. 이후 중종 때 그들에게 작위를 추증하여 억울함을 풀어주고 몰수한 가산을 돌려주었다. 우산군의 7부자를 세칭 칠공자(七公子)라 한다.경기에 터를 잡고 생활하던 온녕군 후손이 남쪽 지방으로 이사를 온 것은 추만(秋巒) 이영기(李榮基, 1583~1661) 때부터다. 그는 유년시절 정승인 유영경(柳永慶, 1550~1661)과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 1563~1628)에게 대성할 그릇이라고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임진왜란을 만나 부모를 여의고 백공(伯公)과 함께 이모 황씨에게 길러졌다. 이모 황씨는 이들이 외롭고 힘든 것을 안타깝게 여겨 굳이 공부를 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영기는 공부에 대한 열정이 남달라 어려운 가운데서도 노력하여 마침내 문사가 박달(博達)하게 되었다. 이후 이모가 풍기의 친정으로 부모를 뵈러 가자 이모와 함께 남행을 하여 외가에 의탁하다가 안동권씨(安東權氏)에게 장가를 들었다. 당시 안동권씨는 그 지역의 유수의 가문으로 이영기의 아내는 충재(沖齋) 권벌(權橃)의 증손 권래(權來)의 딸이었다. 봉화 지역에 세거하던 충재 집안과의 혼인은 낯설고 물설은 타향에 전주이씨 집안이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그의 심지를 알아본 재상 유영경이 음직(蔭職)으로 천거하자 이영기는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은 채 도를 즐기며 처사의 길을 택한 은거불사(隱居不仕)의 삶의 방식은 자식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영기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특히 넷째인 송월재(松月齋) 이시선(李時善, 1625~1715)은 호방한 기질을 타고나 한평생 시류를 따르지 않았고 특별한 스승 없이 독학으로 자신만의 학문 세계를 열어 나갔다.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96호인 송월재종택은 송월재 이시선이 명청동(지금의 봉화군 법전면 풍정리)에 살림집을 짓고 서재를 만들어 학문을 연구했던 곳으로, 7대손인 천로(天老) 이하필(李夏弼, 1847~1909)이 1880년경 지금의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 음지마을로 옮겨 지었다. 지금의 자리는 옮겨온 집에서 50m정도 떨어져 있다. 종택은 음지마을의 나지막한 산을 배경으로 남동향한 몸채가 크게 자리 잡고 우측에 사당이 있다. 정침은 정면 6칸, 측면 6칸의 ㅁ자형으로 앞에 중문간채와 사랑채가 길게 놓이고 뒤편에 안채가 ㄷ자형으로 안마당을 에워싼다. 옆에 있는 사당은 원래 법전리에 있었다가 1·4후퇴 때 소실되었고, 지금은 후손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송월재 불천위 사당이 있다. 원래 대문채는 사라지고 없지만, 종가의 구색과 품격을 비교적 잘 갖추고 있어 음지마을을 대표하는 전통주택으로 도로 건너편 양지마을의 봉화 법전강씨종택(민속자료 제40호)과 함께 법전리의 전통적 풍광을 유지하고 있다.
참고문헌- 권진호, 「18세기 봉화지역 학자들의 학문경향-전주이씨가를 중심으로」, 『18세기 영남의 한문학-봉화 지역을 중심으로』, 계명대학교 출판부, 2015.
- 심경호, 「이시선, <송월자전>」, 『나는 어떤 사람인가』, 이가서,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