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역서재(鳧繹書齋)
부역서재(鳧繹書齋)는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서북쪽 남산리에 있는 밀성박씨(密城朴氏) 국담공파(菊潭公派) 남강재(南岡齋)에서 소장하던 서재(書齋)의 편액이다. ‘부역(鳧繹)’이라는 이름은 『시경(詩經)』 「노송(魯頌)_비궁(閟宮)」에 “부산(鳧山)과 역산(繹山)까지 보유해서 마침내 서국(徐國)까지 크게 넓혀 바닷가 나라에까지 이르니, 회이(淮夷)와 만맥(蠻貊)과 저기 남쪽 오랑캐들도 따르지 않는 이가 없으며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어서 노(魯)나라 임금을 받들고 따르네[保有鳧繹 遂荒徐宅 至于海邦 淮夷蠻貊 及彼南夷 莫不率從 莫敢不諾 魯侯是若]”라고 한 데서 취하였다.글씨는 작자 미상의 행서체이다.
밀성박씨 국담공파 남강재(密城朴氏 菊潭公派 南岡齋) 소개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서북쪽에 있는 남산리는 소말과 남산, 낙성[가말] 등의 자연 마을이 합쳐진 마을이다. 소말은 인근 마을에 비해 작은 마을이다. 그래서 소(小) 마을, 작은 마을을 한문으로 표기하면서 소리(小里) 또는 소촌(小村)이라고 적고 소말이라고 불러오고 있다. 남산이란 이름은 국담(菊潭) 박수춘(朴壽春, 1572~1652)이 이 마을에 살면서 마을 앞산이 비교적 높아서 앞산 또는 남산이라고 불렀던 것이 남산이라는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박수춘이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남산에다 성을 쌓고 의병 활동을 하여 산 이름을 ‘성마루산성’이라고도 부른다.청도군 각북면 남산리 525에는 밀성박씨(密城朴氏) 국담공파(菊潭公派)의 남강재(南岡齋)가 있다. 남강재는 국담 박수춘을 배향하는 재사(齋舍)이다. 각북면사무소를 지나 좌측 남산2리로 들어가 우측을 바라보면 남강서원(南岡書院) 아래 남강재가 있다. 1860년(철종 11)에 건축했고 1985년, 1996년 등에 걸쳐 여러 차례 중수했다. 전면에 세운 3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5칸, 측면 1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인 재사가 있다. 처마 좌우에는 보조 기둥을 세웠다. 중당협실형인 대청마루에는 화산(花山) 권용현(權龍鉉)이 지은 「남강재기(南岡齋記)」,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가 지은 「기제국담정사(寄題菊潭精舍)」가 있고, 그 밖에도 「차국담정사운(次菊潭精舍韻)」, 「원운(原韻)」 등 많은 글이 걸려 있다. 마당 우측에는 동재(東齋)가 있고, 좌측에는 유고집과 판간 보관 장소인 추선각(追先閣)이 있다. 그리고 남강서원은 1694년(숙종 20)에 창건되어 174년간 오졸재(迃拙齋) 박한주(朴漢柱, 1459~1504)와 국담 박수춘을 봉향하여 오다가 1868년(고종 5)에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그로부터 130년이 흐른 1998년, 후손들이 선대 양현(兩賢)의 유학 교육 정신을 보존 숭상하기 위해 정성을 모아 복원하였다. 남강서원의 배향 인물로는 국담 박수춘과 오졸재 박한주가 있다. 또한 조선 명현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회재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친필 서장들이 보관되어 있다.국담 박수춘은 본관이 밀성(密城)이며, 자는 경로(景老), 호는 국담(菊潭) 또는 숭정처사(崇禎處士)이다. 그의 조부는 청도 밀성박씨 행산공파(杏山公派) 입향조인 박대성(朴大成)이며, 아버지는 동몽교관(童蒙敎官) 박신(朴愼)이다. 박수춘은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문인이며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 등과도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창녕의 화왕산성에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싸웠다. 1618년(광해 10) 인목대비의 폐위 문제에 대하여 춘추대의(春秋大義)로써 그 부당성을 지적하는 상소를 지어 올렸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창의(倡義) 격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켰으나, 화의(和議) 성립의 소식을 듣고 산중에 들어가 숭정처사로 자처했다. 한강 정구의 문인으로 장현광(張顯光) 등과 이기설(理氣說)을 토론하는 등 성리학 연구에 힘썼다. 「도통원류록서(道統源流錄序)」는 삼황오제(三皇五帝)로부터 중국의 공자(孔子), 이정(二程), 주자(朱子)에 이르기까지의 도(道) 연원의 흐름을 정리한 글이며, 『동방학문연원록(東方學問淵源錄)』은 조선조 도통의 흐름을 정리한 것이다. 이처럼 여러 분야에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고을의 젊은이 및 노인과 함께 계(稧)를 모으고 백록동서원의 학규(學規)와 여씨향약(呂氏鄕約)으로 과조(科條)를 삼는 향약을 실시했다. 저서로는 『국담박선생문집(菊潭朴先生文集)』, 『독서지남(讀書指南)』, 『학문유해(學問類解)』, 『도통연원록(道統淵源錄)』, 『동방학문연원록(東方學問淵源錄)』, 『의례견문해(疑禮見問解)』 등이 있다. 1672년(현종 13)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박한주의 본관은 밀성이며, 자는 천지(天支), 호는 오졸재(迃拙齋)이다. 고조부는 행산(杏山) 박세균(朴世均)이며, 아버지는 통사랑(通仕郞) 박돈인(朴敦仁)으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83년(성종 14) 사마시 생원·진사 양과에 합격하고, 1485년(성종 1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급제하였다. 전생서직장(典牲署直長)에 제수된 뒤 한성부참군·사헌부감찰을 거쳐 1491년(성종 22) 사간원정언에 제수된 후 성균관전적을 지냈다. 1493년(성종 24) 부모 봉양을 위하여 창녕현감을 청하여 나가 백성들을 지성으로 보살피고 교화시켜 임금이 비단과 교서(敎書)로서 포상, 가자(加資)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종부시주부를 거쳐 1497년(연산 3) 사간원헌납이 되었다. 이때 연산군의 실정(失政)과 무상시로 이어지는 유연(遊宴)을 중지할 것을 극간하자 연산군이 크게 노하였으나 피하지 아니하였으며 임사홍(任士洪) 등의 간악함을 탄핵하는 차자(箚子)를 올렸다. 1498년(연산 4) 무오사화에 김종직의 문도로 몰려 평안도(平安道) 벽동(碧潼)으로 유배되었다. 1500년(연산 6) 전라도 낙안으로 이배되었는데 그곳에서 후학들을 지도하여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다. 이때 임소에서 부친상을 당해 몇 번이나 혼절하였다가 소행하였다. 1504년(연산 10)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5월 15일 참형에 임하면서도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향년 46세였다. 이후 1506년(중종 원년)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고, 1517년(중종 12) 김정(金淨), 조광조(趙光祖) 등의 계(啓)에 의하여 도승지 겸 예문관직제학으로 추증되었다. 풍각면 차산리에 김응조가 찬한 ‘오졸재박한주여표비명(迃拙齋朴漢柱閭表碑銘)’이 세워져 있으며, 밀양 예림서원(禮林書院), 함안 덕암서원(德巖書院), 청도의 석강서원(石岡書院) 및 차산서원(車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에는 『오졸재집(迃拙齋集)』이 있으며, 밀양 5현으로 추앙받고 있다.
참고문헌- 『안동의 문화유산』
- 『안동의 지명유래』
- 유교넷 http://www.ugyo.net/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Index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한국국학진흥원,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