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락재(玩樂齋)
완락재(玩樂齋)는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번지에 위치한 도산서당 재(齋)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도산서원 운영위원회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67㎝, 세로 27㎝이다. ‘완락(玩樂)’은 주자의 「명당실기(名堂室記)」에 “즐기고 완상하여 진실로 내 몸을 마칠 때까지 하여도 싫증나지 않을 것이니, 또 어느 겨를에 외물을 사모하겠는가[樂而玩之 固足以終吾身而不厭 又何暇夫外慕哉]”라고 한 데서 취한 말이다.퇴계가 완락재를 읊은 시는 아래와 같다.主敬還須集義功 경을 위주로 하며 도리어 의를 모으는 공부를 하면 非忘非助漸融通 물망물조장의 뜻과 점점 통하게 되리라 恰臻太極濂溪妙 주렴계 태극의 묘리를 완전히 이해하게 되면 始信千年此樂同 이 즐거움 천년 가도 같음을 믿게 되리라 물망물조장(勿忘勿助長)은 『맹자』 「공손추 상」에 나오는 말로, 호연지기를 기르려면 늘 여기에 힘을 쓰되 그 효과를 기대하지 말아서 마음에 잊지도 말고 억지로 조장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글씨는 퇴계 이황의 친필인데, 손암(損菴) 조근(趙根, 1631~1690)이 「심도산서원일기(尋陶山書院日記)」에서 예서와 전서를 절충한 팔분체(八分體)라고 하였으나, 해서 바탕에 예서를 슬쩍 섞어 씀으로써 변화미를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도산서원 운영위원회(陶山書院 運營委員會) 소개
퇴계 이황은 뛰어난 성리학자인 동시에 훌륭한 건축가였다. 퇴계는 집터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갖고 알맞은 자리를 찾아 헤맸다. 그러다가 1557년(명종 12)에 도산 남쪽에 터를 잡았다. 여기에는 성리학으로 무장된 자연에 대한 철학이 담겨 있었다. 도산서당을 지은 과정은 선생의 제자인 성성재(惺惺齋) 금난수(琴蘭秀, 1530∼1599)가 쓴 「도산서당영건기사(陶山書堂營建記事)」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퇴계가 남언경(南彦經)에게 보낸 편지에도 서당을 건립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내가 사는 이곳은 매우 궁벽한 곳이어서 비록 물과 돌은 있지만 올라가 멀리 바라볼 수 있는 빼어난 경관은 없습니다. 근래 특별히 한 곳을 잡았는데 자못 경치가 좋습니다. 그래서 한 칸 서재를 지어 편안히 앉아서 여생을 끝마치려고 생각하고 있지만 재력이 워낙 없다 보니 그 뜻을 성취할 수 있을지 없을지 기필할 수 없습니다.그리하여 1558년(명종 13)부터 본격적으로 도산서당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퇴계는 그 이듬해에 건축설계도라 할 수 있는 「옥사도자(屋舍圖子)」를 몸소 그렸다. 그리고 집 짓는 일을 맡긴 목수 승려 법련(法蓮)과 집의 제도에 대한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퇴계는 자신이 공부하며 거처할 집이 어떤 모양을 갖추고 방향은 어떻게 놓여야 하는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법련이 죽자 승려 정일(淨一)이 맡아서 1561년(명종 16)에 도산서당이 완공되었다. 법련과 정일은 서당에서 멀지 않은 용수사(龍壽寺)의 승려였다. 한편 농운정사는 도산서당의 부속건물로 제자들의 숙소로 쓰기 위해 지은 집으로, 도산서당이 완성되기 한 해 전인 경신년(1560) 음력 11월에 완성되었다. 도산서당이 완공된 뒤 이황은 이렇게 적고 있다.정사년(1557, 명종 12)에서 신유년(1561, 명종 16)까지 5년 만에 당(堂)과 사(舍) 2채가 그런대로 이루어져 거처할 만하였다. 당은 모두 3칸인데, 중간 1칸은 완락재(玩樂齋)라 하였으니, 그것은 주 선생(朱先生)의 「명당실기(名堂室記)」에 “즐기고 완상하여 진실로 내 몸을 마칠 때까지 하여도 싫증 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말에서 따온 것이다. 동쪽 1칸은 암서헌(巖栖軒)이라 하였으니, 그것은 「운곡(雲谷)」의 시에, “오랫동안 자신하지 못했으니 바위에 깃들여 작은 효험 바라노라”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합해서 도산서당(陶山書堂)이라고 현판을 달았다. 사는 모두 8칸이니, 시습재(時習齋)·지숙료(止宿寮)·관란헌(觀瀾軒)이라고 하였는데, 모두 합해서 농운정사(隴雲精舍)라고 현판을 달았다. 서당 동쪽 구석에 조그만 못을 파고 거기에 연(蓮)을 심어 정우당(淨友塘)이라 하고, 또 그 동쪽에 몽천(蒙泉)이란 샘을 만들고, 샘 위의 산기슭을 파서 암서헌과 마주 보도록 평평하게 단을 쌓고는, 그 위에 매화·대[竹]·소나무·국화를 심어 절우사(節友社)라 불렀다. 당 앞 출입하는 곳을 막아서 사립문을 만들고 이름을 유정문(幽貞門)이라 하였는데, 문밖의 오솔길은 시내를 따라 내려가 동구에 이르면 양쪽 산기슭이 마주하고 있다. 그 동쪽 기슭 옆에 바위를 부수고 터를 닦으니 조그만 정자를 지을 만한데, 힘이 모자라서 만들지 못하고 다만 그 자리만 남겨두었다. 마치 산문(山門)과 같아 이름을 곡구암(谷口巖)이라 하였다. 여기서 동으로 몇 걸음 나가면 산기슭이 끊어지고 바로 탁영담에 이르는데, 그 위에 커다란 바위가 마치 깎아 세운 듯 서서 여러 층으로 포개진 것이 10여 길은 될 것이다. 그 위를 쌓아 대(臺)를 만들었더니, 우거진 소나무는 해를 가리며, 위에는 하늘 아래에는 물이어서 새는 날고 고기는 뛰며 물에 비친 좌우 취병산의 그림자가 흔들거려 강산의 훌륭한 경치를 한눈에 다 볼 수 있으니, 이름을 천연대(天淵臺)라 하였다. 그 서쪽 기슭 역시 이것을 본떠서 대를 쌓고 이름을 천광운영(天光雲影)이라 하였으니, 그 훌륭한 경치는 천연대 못지않다.도산서당은 이황이 기거하며 공부하고 가르치던 집이다. 이 집은 특히 암서헌 동쪽 끝에 달아맨 살평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살평상은 이황이 제자인 이덕홍(李德弘)의 조부 이현우의 집에서 배워서 가지고 온 것이다. 이현우의 집은 비좁아서 처마 밑에 방을 하나 달아매어 사용하였다. 이황은 그것을 보고 검소함에 찬탄을 금치 못하여 ‘모름지기 선비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처마 밑에 달아맨 방을 여기 서당의 한쪽에 가져다 놓은 것이다. 그러니까 살평상은 이황이 욕심내지 않고 선비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향도(嚮導)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스승인 셈이었다.
참고문헌- 이황, 『퇴계선생문집(退溪先生文集)』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 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