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루(賜書樓)
사서루(賜書樓)는 정조가 준 서적을 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 1749~1807)이 보관하기 위해 마련해둔 서재 편액이다. 이 편액은 안동김씨(安東金氏) 감찰공파(監察公派) 후손인 둔굴재(屯屈齋) 김부일(金富鎰)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것을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90㎝, 세로 34㎝이다. ‘사서(賜書)’는 ‘왕이 서책을 내려주다’라는 뜻으로, 맹자의 후손이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책을 보관하고 관리하던 중국 산동 맹부(盟府)의 사서루에서 처음 찾아볼 수 있다. 유득공은 정조의 지극한 사랑을 받아 서얼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총 68권 273책에 달하는 많은 서적을 하사받아 사서루에 보관하였다는 기록이 문암(問菴) 유본학(柳本學)의 「사서루기(賜書樓記)」에 보인다.
사서루는 나의 선친이 정조대왕께서 하사하신 서적을 봉장하던 곳이다. 옛 고서관 골목에 있는데 다락은 세 칸이고 구조는 치밀하고 깨끗하다. 앞에는 작은 발이 있고 곁에는 찔레와 앵두 대여섯 그루를 심었다. 선군(先君)께서는 퇴근하시면 늘 이곳에서 한가하게 지내셨다. 정조가 1776년 규장각을 건립하자 규장각 학사들이 문필이 뛰어난 선비들을 선발하여 속관으로 삼자고 주청했다.
선군(유득공)과 정유각(貞蕤閣) 박제가(朴齊家, 1750~1805)와 아정(雅亭)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먼저 여기에 선발되었다. 박공은 시필이 절묘했으며 이공은 박식으로 유명했다. 선군께서는 내원에 드시자 임금의 은총이 보통을 넘어 안팎으로 관직을 지내시고 마침내 문학으로 집안을 일으키셨다. 20년을 공직에 계시면서 임금께서 하사하신 국조의 사책(史冊), 모훈(謨訓)과 경서, 동국문집, 산록, 집찬이 수백 권이었다. 종이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고 글자체는 가지런했으며 빼곡히 서가에 꽂혀 있는데 손을 대면 목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선군께서 이를 위해 건물을 지은 것은 전대에 없던 영광을 드러내고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해서다. 불초한 형제도 선군을 이어 내원에 출사했는데, 하사하신 서적이 수십 권이나 된다. 은총은 더욱 극에 이르렀지만 사실 선군에서 남기신 음악 때문이었다. 삼가 함께 수장하고 글을 지어 기록한다.
글씨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쓴 예서체이다. 이는 김정희가 젊은 시절 절친했던 유본학의 아버지이자 금석학의 대선배인 유득공을 위해 써준 것이다. ‘賜(사)’ 자 우측의 ‘易(역)’ 자와 ‘樓(루)’ 자 좌측의 ‘木(목)’ 자가 굵고 튼튼한 획을 거느리고 견고한 벽을 형성하였다. ‘賜’ 자 좌측의 ‘貝(패)’ 자에서 좌우를 튼튼한 세로획으로 중심을 잡고 그 속에 가벼운 가로획이 가지런히 자리하여 단정하다. 짧고 가벼운 다리 아래 시원한 공간을 두어 시선을 확 트여준다. ‘樓’ 자 우측에 치밀한 목가구(木架構)를 구성한 듯 중첩된 횡획을 꿰뚫어 단단하게 부여잡은 짧은 종획이 견고하다. 그 무거운 중량감을 행기(行氣)를 안고 속도감 있는 붓질로 이루어낸 곡선의 ‘女(여)’ 자가 경쾌한 발걸음으로 자리하여 경직된 분위기를 일거에 해소한다. 임금이 내려준 귀한 책을 보관하는 서고의 위용을 보여주는 듯 기운찬 횡획이 중첩되어 높이 솟고 그 아래 불안정한 위치에 ‘日(일)’ 자가 있어 위태로울 뻔하지만 우상에서 좌하로 이어지는 매우 힘찬 획으로 보완하여 안정감을 획득한 ‘書(서)’ 자의 조형이 경이롭다. 굵고 튼튼한 획으로 견고하게 벽을 구성하고, 맑고 가벼운 획으로 속을 채우고, 곡선과 사선이 묘하게 섞이며 신선함을 부여하고, 키가 크고 작은 글씨의 배치가 이루어낸 조화가 흥미롭다. ‘樓’ 자의 ‘木(목)’ 자를 짧게 써서 위로 올리고 그 아래에 두 과의 도서(圖署)를 배치한 치밀한 구성도 놀랍다. 화려한 장정을 한 아름다운 책을 보관하는 장소임을 드러내는 듯 편액의 윤곽도 화려한 장식으로 마무리함이 정성스럽다. (서예가 遯石 양성주)
안동김씨 관찰공파 둔굴재 소개
유득공(柳得恭, 1749~1807)의 본관은 문화(文化), 자(字)는 혜보(惠甫)·혜풍(惠風), 호는 영재(泠齋)·영암(泠菴)·가상루(歌商樓)·고운거사(古芸居士)·고운당(古芸堂)·은휘당(恩暉堂)이다.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1779년(정조 3) 규장각검서(奎章閣檢書)가 되었으며 포천, 제천, 양근 등의 군수를 거쳐 풍천부사에 이르렀다. 규장각검서 당시 다양한 서적을 읽으면서 신라사 위주의 국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고, 이후 『발해고(渤海考)』와 『사군지(四郡志)』 등을 출간하였다. 외직에 있으면서도 검서를 겸임하여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서이수(徐理修) 등과 함께 4검서라고 불렸다. 서얼 출신 학자로 실학 사상가이면서 역사가로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 시대로 인식한 학자이다.
진사(進士) 유춘(柳瑃)과 남양홍씨 부인의 아들로 1748년(영조 24) 12월 24일 한성부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유춘은 16세에 1년 연상인 남양홍씨 홍이석(洪以錫)의 딸과 결혼하여 8년 만에 외아들 유득공을 낳았다. 그러나 유득공의 증조부인 유삼익(柳三益)과 외할아버지 홍이석이 서자인 까닭에 그는 태어나면서 서얼 신분을 타고났다. 또한 그의 할머니 우계이씨 또한 이서우(李瑞雨)의 서녀였다. 그는 본래 남인 가계로 그의 외5대조 홍석신(洪碩臣)은 만전당(晩全堂) 홍가신(洪可臣)과 사촌간이며, 홍가신의 손자인 남인의 중진 홍우원(洪宇遠)은 그의 외증조부뻘 되는 친족이었다. 또한 외외증조부 이서우 역시 남인의 중진이었다. 하지만 연암 박지원의 문하에 들게 되었고, 이후 노론 북학파로 전향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암기력에 능하였다. 후에 호를 영재(泠齋)라 하고 다른 호로는 영암(泠庵), 고운당(古芸堂) 등이 있는데, 특히 고운당은 지명으로 운동(芸洞)이라고도 불리던 한성부 교서관동(校書館洞 후일 서울시 중구 충무로 2가 부근)에 그가 오랫동안 살면서 지은 당호(堂號)이다.
1752년(영조 28) 아버지 유춘이 사망하자 남양의 외가로 이사했다. 1757년(영조 33) 8세가 되자 외가에서 한성으로 돌아왔다. 유득공은 일찍이 18, 19세부터 시 짓기를 배워서 능했다. 20세 이후에는 북학파인 박지원을 사사하고 이어 이덕무와 박제가를 만나서 그들과 평생의 지기로 교류했다.
그는 좋은 시를 짓기 위해 여러 책을 읽었다. 다른 북학파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시를 짓기 위해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문학 작품을 섭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다양한 독서를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삼국지』와 『수호전』을 비롯해 중국의 고전 서적을 다양하게 구해서 독서하였다. 구하기 어려운 책은 직접 빌려서 탐독하고 이를 필사본으로 베껴서 자신의 집에 비치해 두고 계속 읽었다. 또한 만주, 몽골, 타타르, 회회(回回 이슬람), 인도, 베트남[安南], 라오스[南掌], 미얀마[緬甸], 타이완, 일본, 류큐 및 서양의 홍모번(紅毛番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존재에도 관심을 가지면서 청나라 일변도, 청나라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뒤 자신의 시문을 모은 『영재집(冷齋集)』을 출간하고 1772년(영조 48)에는 한국의 역대 시문을 엮은 『동시맹(東詩萌)』을 편저하였다.
1773년(영조 49) 생원시에 합격, 생원이 되었다. 그 뒤 영조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는 서얼인 탓에 관직의 제한이 있었고, 출사 대신 지기들을 만나며 학문 연구와 역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 뒤 1777년(정조 1) 청나라 여행과 관련된 것으로서 청나라 여행의 기행문이자 여러 청나라 문사들의 시문을 모은 『중주십일가시선(中州十一家詩選)』을 출간하였다.
32세 되던 1779년(정조 3) 정조가 서얼허통(庶孼許通)령을 내리면서 시문과 글짓기와 해박한 지식이 인정되어 그해 7월 13일(음력 6월 1일) 특별히 규장각검서에 임명되었다. 이때 그와 함께 규장각검서에 임명된 박제가·이덕무·서이수와 함께 ‘규장각의 4검서’라 불린다. 규장각검서로 있었기 때문에 궁중에 비장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일본의 사료까지도 읽을 기회를 많이 갖게 되었다. 이런저런 역사서를 읽고 그는 ‘고려시대의 역사가들이 통일신라를 남조로, 발해를 북조로 하는 국사 체계를 세우지 않았던 것이 영원히 옛땅을 되찾는 명분을 잃게 되었다’라며 발해사가 국사에서 제외된 것에 한탄하기도 했다.
시문과 재주에 능하여 정조의 특별한 지우를 얻은 계기로 그는 서얼 출신이라는 신분 제약에서 벗어나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1786년(정조 10) 포천현감(抱川縣監)·제천군수(堤川郡守), 1788년(정조 12) 양근군수(楊根郡守)·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사도시주부(司寺侍主簿)를 거쳐 1792년(정조 16) 가평군수(加平郡守)를 지냈다. 또한 북학파의 거장 박지원의 제자로 이덕무 등과 더불어 실사구시(實事求是)로 산업 진흥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박제가·이덕무·이서구(李書九)와 함께 한학 4가(漢學四家)라고도 불리었다.
그 뒤 풍천도호부사(豊川都護府使)로 나갔으나, 1800년(정조 24) 8월 18일 그를 아끼던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하자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였다. 개성·평양·공주 등과 같은 국내의 옛 도읍지를 유람하였고 두 차례에 걸쳐 중국 베이징에 연행(燕行)하고 돌아왔으며 자신이 본 문물과 경험을 토대로 기행문과 소설, 역사서 등의 뛰어난 저술을 남겼다. 1807년(순조 7) 10월 1일(음력 9월 1일)에 5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참고문헌
박철상, 『서재에 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