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 삼당공파 현애문중(安東金氏 三塘公派 玄厓門中)
김영(金瑛, 1475~1528)이 청풍계에 태고정과 삼당(三塘) 등을 조성하였으나 이 집안이 이곳에 세거한 것은 한성부판관을 역임한 김계권(金係權, ?∼1458) 때부터였다. 김계권은 김삼근(金三近)의 아들이고,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1431∼1518)의 형이다. 김계권은 5남 6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학조대사(學祖大師, 1431∼1514), 김영전(金永銓), 김영균(金永勻), 김영추(金永錘), 김영수(金永銖, 1446∼1502)이다. 김계권이 죽은 뒤 청풍계 집은 다섯째 아들인 김영수가 관리하게 되었고, 그의 세 아들 김영, 김번, 김순(金珣) 중 장남인 김영이 물려받게 된다. 그리고 청풍계 집은 이후 아들 김생락(金生洛), 손자 김기보(金箕報, 1531∼1588)에게 전해졌다. 그런데 김기보가 풍산으로 낙향하면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1561∼1637)에게 청풍계의 집을 물려주게 된다. 즉 초창기 태고정의 주인은 김영→김생락→김기보 조부손(祖父孫)으로 이어지다가 김기보가 안동으로 내려오면서 김영의 종증손인 김상용에게 전해졌다. 이후로는 김상용 가문에서 청풍계 집을 소유하고 관리하게 되었다.
김상용은 김기보로부터 청풍계 집을 물려받았으나 그가 청풍계를 집중적으로 조성하고 주변의 사물에 이름을 부여한 시기는 그의 나이 48세 되던 해인 1608년(선조 41)이다. 이즈음에 김상용은 석봉 한호의 ‘태고정(太古亭)’과 ‘청풍각(淸楓閣)’ 현판을 받아 걸었고, ‘청풍계(淸風溪)’ 세 글자를 써서 대들보에 걸었고, 선조(宣祖)가 하사한 어필(御筆)을 홍벽색(紅碧色) 비단에 싸서 보관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소오헌(嘯傲軒) 오른쪽의 온실(溫室) 남쪽 창 문미(門楣) 위에는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쓴 “창문이 빼어난 시내에 임하여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길손이 우뚝한 봉우리에 이르자 흰 구름을 쓰네[窓臨絶磵聞流水 客到孤峰掃白雲]”라는 글씨를 걸어두었다. 현재 선조와 소현세자가 쓴 글씨는 실전된 듯하다.
김상용은 1618년(광해군 10)에 부친 김극효(金克孝)가 세상을 뜨자 원주에 거처하면서 청풍계를 그리는 시편을 짓기도 하였고, 다시 청풍계로 돌아왔지만 1637년(인조 15) 강화도에서 순절하였다. 그리고 아우 김상헌(金尙憲, 1570∼1652)도 심양에 볼모로 끌려가게 되면서 청풍계는 쓸쓸해지게 되었다.
이후 청풍계가 다시 활기를 되찾은 것은 김상용의 고손 김시걸(金時傑, 1653∼1701)과 김시보(金時保, 1658∼1734) 형제가 청풍계의 주인이 되었을 때이다. 이때 족숙인 김창집(金昌集, 1648∼1722), 김창협(金昌協, 1651∼1708), 김창흡(金昌翕, 1653∼1722), 김창업(金昌業, 1658∼1721) 형제를 포함하여 홍세태(洪世泰, 1653~1725), 이병연(李秉淵, 1671~1751), 어유봉(魚有鳳, 1672~1744), 조정만(趙正萬, 1656~1739) 등이 이곳에 들러 성황을 이루었고, 겸재(謙齋) 정선(鄭敾)이 「청풍계도(淸風溪圖)」를 그려 당시의 아름다운 풍광을 전하였다.
한편 조정에서는 김상용의 충절을 기려 1708년(숙종 34)에 청풍계에 늠연사(凜然祠)를 건립하여 김상용의 화상을 봉안하도록 하였다. 이때 늠연사 앞의 돌에 송시열(宋時烈)의 ‘대명일월(大明日月)’ 네 글자를 새겼다. 그러나 이 글씨는 일제 때 이곳에 주택을 짓느라 훼손되어 현재는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이보다 앞서 주희(朱熹)의 ‘백세청풍(百世淸風)’ 네 글자를 천유대(天遊臺, 일명 憑虛臺) 바위에 새겨 김상용의 청풍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이곳을 청풍대(淸風臺)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18세기 이후 청풍계는 늠연사와 함께 주희와 송시열의 글씨인 ‘백세청풍’, ‘대명일월’ 여덟 글자로 인하여 그 성가를 더하게 되었다.
18세기 중반 이후 태고정을 포함한 청풍계 집은 김영행(金令行), 김이진(金履晉), 김세균(金世均) 등의 자손에게 전해지고 당시의 문인인 남유용(南有容), 오원(吳瑗), 황경원(黃景源), 안석경(安錫儆), 박준원(朴準源), 이덕무(李德懋), 이서구(李書九) 등도 이곳에 들러 시로 이곳의 아름다운 풍광을 묘사하고 안동김문(安東金門)의 성예를 기리기도 하였다.
북애종택(北厓宗宅)은 대봉산 아래 정남향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 중기의 건축물로, 원래 노씨문중(盧氏門中)의 종택이었으나 후손이 없자 외손인 황씨(黃氏)와 신씨(申氏)가 이어 살다가 신씨 역시 대를 이을 아들이 없게 되어 그의 외손 김후가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대문채 없이 넓은 대지에 사랑채와 안채가 연결된 口자형 구조로 되어 있다. 그리고 안대청에는 대한제국 때의 문신이자 독립운동가인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1846∼1922)이 쓴 매죽헌(梅竹軒) 현판이 걸려 있다.
참고문헌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Ⅱ』, 2016
김남기, 「태고정」, 안동청년유도회 제27회 누정순회강좌,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