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계서원(三溪書院)
권벌(權橃, 1478~1548)은 닭실마을의 안동권씨 입향조로, 자가 중허(仲虛), 호가 충재(冲齋)·훤정(萱亭)·송정(松亭)이다. 아버지 권사빈(權士彬)은 안동 우향계인 진솔회(眞率會)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는데, 이때 회원들이 계축으로 만들어 나누어 소장한 『우향계축(友鄕契軸)』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당시 진솔회의 회원은 모두 15명[이굉(李浤), 이명(李洺), 정원로(鄭元老), 이영전(李永銓), 김윤리(金允离), 박숙(朴䃞), 권숙균(權叔均), 정희주(鄭希周), 구인정(具仁貞), 권철종(權哲從), 권철경(權哲經), 권사빈(權士彬), 권사영(權士英), 남팔준(南八俊), 남경지(南敬智)]이다. 권벌은 1496년(연산 2)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07년(중종 2) 문과에 급제하였다. 기실 1504년(연산 10)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과거 답안지 책문에 ‘처(處)’ 자가 들어갔다는 이유로 취소되었다. 이는 연산군이 김처선(金處善)의 직간(直諫)에 노하여 김처선을 죽이고는 중외(中外)의 문자에 ‘처(處)’ 자와 ‘선(善)’ 자를 쓰지 못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충재는 조선시대 4대 사화에서 갑자년의 사화를 제외한 나머지 세 종류의 사화를 몸소 겪으면서 이를 슬기롭게 극복한 인물이다. 화변이 닥칠 때마다 번번이 기지를 발휘한 그는 무오사화(1498년)에는 화를 당한 선비들을 신원하였고, 기묘사화(1519년)에는 삼척부사로 재임 중에 올바른 의론을 펼치다가 파직되어 고향인 안동 도촌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이듬해(1520년)에 43세의 나이로 안동 도촌에서 내성현 닭실로 이거하여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였다. 이후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절의를 지키면서 진퇴를 반복하였다. 그러다가 을사사화(1545) 때는 화변을 진정시켜 만세에 풍교(風敎)를 수립하였으나, 1547년(명종 2) 양재역벽서사건으로 인하여 삭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3월에 운명하였다. 1570년(선조 3) 충정(忠定)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1592년(선조 25) 불천위(不遷位)의 명이 내려졌으며, 1601년(선조 34) 삼계서원에 위패를 봉안하였고 삼계서원은 1660년(현종 1)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746년(영조 22) 영조가 권벌의 수진본 『근사록』을 열람하고는 새로 간행한 『근사록』 한 질을 하사하였다. 1794년(정조 18)에는 정조가 『심경』 한 질을 더 하사하고 석판에 새긴 「어제서문(御製序文)」을 함께 내렸다. 「어제서문」은 정조가 지었고 글씨는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썼으며, 현재 청암정에 걸려 있다. 한편 1851년(철종 2)과 1853년(철종 4) 그리고 1883년(고종 20)에는 유생들이 문묘 배향을 청원하는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권벌의 덕행과 절의는 세인들의 추종을 받아왔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일을 먼저 처리하여 사람을 구하였으니 그 변화가 공중의 구름같이 어떻게 변할지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었고, 자신의 안위는 잊고서 험난함을 범하였으니 그 의(義)가 실로 추상(秋霜)보다 늠름하였다”라고 하였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는 “평소에는 온화한 기운이 훈훈하여, 평민이나 천한 종들이라 하더라도 모두 은혜롭고 후덕하게 대우하였다. 그러나 대사(大事)에 임하고 대변(大變)에 처해서는 얼굴에 의로운 기색을 드러내고는 곧장 나아가 직접 담당하여 처리하였으니, 제아무리 맹분(孟賁)과 하육(夏育) 같은 용맹이 있을지라도 능히 빼앗을 수 없는 점이 있었다”라고 하였다. 미수(眉叟) 허목(許穆)은 권벌의 유고를 읽고서 “후덕(厚德)과 대절(大節)은 유림 학사들이 존모(尊慕)함을 그치지 않았고, 오래되어도 잊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런 후배들의 평가를 통해 우리는 그를 도덕군자, 절의군자라고 부를 수 있을 듯하다.
참고문헌- 권두경, 『창설재집(蒼雪齋集)』
- 권벌, 『충재집(冲齋集)』
-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사전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 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