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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 소정문중(慶州李氏 蘇亭門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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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간명 경주이씨 소정문중(慶州李氏 蘇亭門中)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보정로 25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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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 소정문중(慶州李氏 蘇亭門中)

경주이씨 소정문중(慶州李氏 蘇亭門中)



경상북도 경주 소정의 경주이씨는 고려 후기의 대학자이며 정치가인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후손으로 조선 초 이래로 경주의 방어리·구정리 일명 소정 일대에 세거하며 사환과 학문을 지속해온 양반 가문이다. 경주이씨는 이알평을 시조로 하는 성관으로 고려시대 이래로 상경종사하며 사환가로서의 문호를 확대하였고, 고려 후기에는 이제현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며 가문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소정의 경주이씨는 이제현의 장자 이서종(李瑞鍾)의 3자인 이원익(李元益)의 후손 계열로서 조선 초기에 고향인 경주로 낙남한 경우였다. 이서종의 세 아들 중 장자 이보림(李寶林)은 이제현의 장손으로 대사헌·정당문학을 지내는 등 관계에서 활약이 컸고, 사후에는 문숙(文肅)이란 시호가 내렸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그는 사람됨이 엄격하고 품행이 방정하였으며 정치적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차자 이실림(李實林)은 그 행적이 문헌으로 전하는 것이 없고, 후사마저 없어 족보에도 이름만 올라 있는 정도이다. 3자 이원익이 바로 소정 경주이씨의 선대인데, 그 역시 대사성을 지낸 것으로만 기록되어 있을 뿐 다른 행적은 상고할 수 없다. 이원익의 외아들 이선(李瑄)은 호가 정헌(正軒)이고, 벼슬이 병조판서로 기록되어 있으나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의 그의 행적이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정헌이란 아호(雅號)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상당한 학식을 지녔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로서는 더 이상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이처럼 소정 경주이씨의 선대는 이제현 이후 3대 동안 사환과 학식에 있어 침체기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경주이씨는 이선의 아들 죽은(竹隱) 이지대(李之帶, 1369~1459) 대에 이르러 커다란 변화가 수반되었다. 이선의 차자였던 이지대는 벼슬이 한성부판윤에 이르렀는데,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할 조짐이 보이자 낙남하여 경주의 구량리[九良里, 中里]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지대가 구량리에 정착하게 된 지역적 배경은 자세하지 않지만 그가 정란을 피해 관향지로 이주한 것은 분명하다. 이지대 역시 행적이 상세하지는 않으나 무반직에 종사한 것으로 보인다. 1394년(태조 3) 당시 경상도수군만호였던 이지대는 왜선을 포획한 공으로 음식과 비단·명주를 하사받은 바 있었고, 족보에는 경상도수군절제사를 거쳐 한성판윤을 지낸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정황을 고려한다면, 이지대는 경상도수군만호 또는 수군절제사 재직 시절에 구량리 일대를 점지해두었을 가능성이 크고, 계유정난의 기미가 보이자 솔가하여 이거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구량리는 경주 관할이지만 지역적으로는 울산에 치우쳐 있어 이런 추측을 더욱 가능케 한다. 이지대는 구량리에 입거하면서 손수 은행나무를 심었는데, 수백 년이 지나도록 무성하게 자라고 있으며, 1865년(고종 2)에는 후손들에 의해 유허비가 건립되기도 했다.
한편 경주이씨는 낙남 후에도 석학이나 고관을 배출하지는 못했다. 이지대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자 이점(李點)은 생원을 거쳐 부사를 지냈고, 차자 이묵(李黙)은 벼슬이 없었고, 3자 이연(李然)은 하급직인 건원릉참봉을 지내는 데 그쳤다. 이점은 슬하에 석림(碩林)·원림(元林)·형림(亨林)과 한숙로(韓淑老)·이수회(李壽會)에게 출가한 딸을 합해 3남 2녀를 두었다. 이 중 차자 이원림(李元林)이 소정 경주이씨의 선대이고, 3자 이형림(李亨林)의 후손들은 현재 경주시 안강읍 양월리에 세거하고 있다. 이원림 형제 대에 이르러 경주이씨는 무반 가문으로서의 색채가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이런 정황은 이원림이 무과에 합격하여 병마첨절제사·재령군수·태안군수 등을 지내고, 이형림의 관계(官階)가 선략장군이라는 점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되고 있다. 그런데 이점 대에서 주목할 사실은 혼맥과 거주지의 변화이다. 이점은 여주이씨(驪州李氏) 출신의 이수회(李壽會)를 사위로 맞았는데, 이수회는 곧 후일 영남학파의 명유로 성장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조부이다. 물론 여주이씨의 가격이 급격히 신장된 것은 이언적 이후의 일이지만 이수회의 아들 이번(李蕃)이 손소(孫昭)의 사위가 되어 양동에 입거한 사실을 고려할 때 여주이씨도 이때부터 서서히 기가의 조짐을 보인 것은 분명하다. 어쨌든 이점의 딸과 이수회의 혼인은 후일 경주이씨와 여주이씨가 세의를 유지하며 통혼을 지속하게 되는 중요한 고리가 되었음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 김학수, 「고문서(古文書)를 통해 본 소정(蘇亭) 경주이씨가(慶州李氏家)의 가계(家系)와 사회경제적(社會經濟的) 기반」, 한국학중앙연구원
  • 유교넷-목판아카이브(http://mokpan.ugyo.net/hyunpan/)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한국국학진흥원, 2016
  • 유교넷(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