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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손씨 연정종택慶州孫氏 蓮亭宗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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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간명 경주손씨 연정종택慶州孫氏 蓮亭宗宅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공정길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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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손씨 연정종택慶州孫氏 蓮亭宗宅

경주손씨 연정종택慶州孫氏 蓮亭宗宅



매호(梅湖) 손덕승(孫德升, 1659~1725)은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선대는 양동에 정착한 7대조 손소(孫昭, 1433~1484)가 문과에 급제하여 청요직을 지내는 한편으로 적개공신에 녹훈되어 계천군에 봉해짐으로써 문벌 가문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확보했다. 양동의 경주손씨(慶州孫氏)는 손소의 아버지 손사성(孫士晟) 대부터 사환가의 전통을 세워나가기 시작했고, 손소의 현달로 인하여 가격(家格)이 한층 고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손사성은 환로에 있는 동안 청백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15세기 관료사회의 모범이 되었고 그의 맑고 덕스러운 삶의 자세는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그리하여 손덕승은 손사성을 경주손문(慶州孫門)의 기가조로 인식하였다.
한편 손덕승의 7대조 손소는 21세 되던 1453년(단종 1)에 사마양시에 합격했고, 1457년(세조 3) 풍덕류씨(豊德柳氏)와의 혼인을 계기로 청송 안덕에서 경주 양좌동으로 이거하였다. 2년 뒤인 1459년(세조 5)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문신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손소는 슬하에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집안의 종통을 이어받은 사람은 중자(仲子) 손중돈(孫仲墩)이고, 막내 어은(漁隱) 손윤돈(孫閏暾)이 손덕승의 6대조가 된다. 손윤돈은 부친의 훈공에 힘입어 수의부위의 직함을 가졌으나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학문과 행신에 힘써 덕행으로 사림의 추중을 받았다. 손덕승의 증조(曾祖) 손로(孫魯, 1578~1649)는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학덕을 겸비한 선비로 명망이 높았다. 특히 그는 무실(務實)을 중시하여 임진왜란 때는 겨우 15세의 나이로 창의하는 결기를 보였다. 또 1630년(인조 8) 옥산서원(玉山書院) 원장이 되어 경주 사림의 영수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아들 손종계(孫宗啓)와 손자 손건(孫鍵)이 옥산서원의 유생으로 학업에 관심을 두는 계기를 마련하였는데, 이들 3대의 관심사는 손덕승이 영남학파 구성원이 되어 학문적 연원을 잇게 하는 모태가 되었다.
양동마을은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북쪽 설창산에 둘러싸여 있는 유서 깊은 전통 마을로, 500년이 넘는 고색창연한 54호의 대규모 고택과 110여 호의 초가로 이루어져 있다. 양동마을 내에 보물이나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곳은 모두 15가옥인데 가장 오랜 집은 서백당(書百堂)으로 추정된다. 대체로 큰종가는 산등성이의 높고 넓은 터에 위치하고 파종가들은 좀 낮은 자리에 그리고 상민들은 다시 더 낮게 위치하는 반가의 배열 법도가 지켜져 있다. 1984년 12월 20일 대한민국 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고, 2010년 7월 31일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제34차 회의에서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양동마을은 대한민국 최대 규모와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대표적인 조선시대 동성(同姓) 취락으로 월성손씨(月城孫氏), 여강이씨(驪江李氏) 양 성의 양반 가문이 서로 경쟁 및 협동하며 600여 년의 역사를 일궈온 마을이며, 훌륭한 재상과 많은 유학자를 배출했다. 이황(李滉)에 앞서 영남학파의 선구자인 대학자 이언적(李彦迪)을 비롯하여 지금까지도 수많은 인재를 배출해오고 있기도 하다. 1992년 영국의 찰스 황태자가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에 7개소의 국가지정 전통마을이 있으나 마을의 역사와 규모 및 보존 상태, 문화재의 수와 전통성 및 가치, 그리고 뛰어난 건축과 조경 양식,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때 묻지 않은 향토성 등의 면에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우수한 가치를 지닌 마을로 평가받고 있다. 양동마을 내에는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전통가옥의 수는 전국 최다로 이를 포함하여 국보 1점, 보물 4점, 중요민속자료 12점, 경북유형문화재 2점, 경북기념물 1점, 경북민속자료 1점, 경북문화재자료 2점, 경북향토문화재 2점 등 총 24점의 지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경북 지방 『고문서집성』에 의하면 여강이씨인 이광호(李光浩)가 이 마을에 거주하였으며, 그의 손서가 된 풍덕류씨 류복하(柳復河) 처가에 들어와 살았다. 이어서 양민공 손소가 540여 년 전 류복하의 무남독녀와 결혼한 후 청송 안덕에서 처가인 양동으로 이주하여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아 이곳에서 살았다. 그는 후에 공신이 되어 고관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이처럼 손씨, 이씨 두 씨족에 의해 오늘과 같은 양동마을이 형성되었다. 양동마을이 외손마을이라 불리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며 실제로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남자가 처가를 따라가서 사는 경우가 많았다.
월성손씨는 신라 건국 초기 32년(유리왕 9)에 사로 6촌 중 하나인 무산대수촌의 촌장 구례마(俱禮馬)가 손씨로 사성받은 것이 그 성씨의 연원이다. 그 후 신라 42대 흥덕왕 때 석종고사(石鍾古事)의 주인공인 손순(孫順)을 중조로 하고 경주, 밀양, 평해 3파로 갈렸으나 경주가 그 주류이다.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는 문헌상 고증할 수 있는 세계(世系)가 실존하지 않고 여말에 가서 판밀직사사를 지낸 손경원(孫敬源)을 1세로 하여 2세 손현검(孫玄儉)에 이어 3세 등 조선조 태조 때 감찰공으로 이어져 경주손씨의 족보가 이루어졌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25세를 이었고, 1457년(세조 2)에 건축된 경주시 양동마을의 종택 서백당(書百堂)에 뿌리를 두고 경주, 상주를 거점으로 전국에 분포되어 있다.
손씨의 종댁인 서백당은 우재(愚齋) 손중돈과 외손인 회재(晦齋) 이언적이 태어난 곳이며 500여 년 전 손소의 영정[보물 제1216호]과 「적개공신교서(敵愾功臣敎書)」 및 「논상록권(論賞錄券)」[유형문화재 제13호)」, 「분재기(分財記)」[문화재 제14호] 등이 보관되어 왔고, 근래에는 세계 유일본인 원나라 법전 『지정조격(至正條格)』이 발견되어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위탁·관리되고 있다. 아울러 조선 초기부터 3대 봉군에 불천위로 받드는 명현거유(名賢巨儒)로 참의 손사성,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적개공신2등으로 계천군(鷄川君)에 봉군된 참의 양민공 손소, 우참찬 청백리 손중돈 등 문장과 덕망이 높은 인물을 배출하여 영남 사족으로서 확고히 자리 잡은 명문 성씨이다. 월성손씨는 이 땅에 뿌리내린 이래 남한에만 10여 만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참고문헌
  • 김학수, 「영남학인 손덕승의 학자·관료적 성격」, 『퇴계학과 유교문화』 제57집
  • 「여강이씨(驪江李氏, 驪州李氏) 및 월성손씨(月城孫氏, 慶州孫氏) 경주시 강동면(江東面) 양동(良洞) 마을」, 용궁 여주이씨종친회(http://cafe.daum.net/ygmui/)
    유교넷-목판아카이브(http://mokpan.ugyo.net/hyunpan/)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한국국학진흥원,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