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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정씨 줄포 안협댁(희현당)羅州丁氏 茁浦 安峽宅(希賢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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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간명 나주정씨 줄포 안협댁(희현당)羅州丁氏 茁浦 安峽宅(希賢堂)
  • 주소 경북 영주시 줄포길 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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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정씨 줄포 안협댁(희현당)羅州丁氏 茁浦 安峽宅(希賢堂)

나주정씨 줄포 안협댁(희현당)羅州丁氏 茁浦 安峽宅(希賢堂)



경상북도 영주 시내에서 서천교를 건너 풍기 방향으로 향하다 보면 상줄동 줄포길이 나온다. 조금 더 가다 보면 바로 400년 세거한 나주정씨(羅州丁氏) 집성촌이 보인다. 줄포마을로 들어서면 드넓은 줄풀들이 연둣빛 물결로 넘실거리며 바람을 이고 나른다. 소백산에서 뻗어 내린 주마산 지맥이 동남으로 이어진 매봉산과 송령산이 마을 뒤를 병풍처럼 휘두르고, 마을 앞 들녘 한복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서천은 넓은 줄포평야를 기름지게 한다. 줄포는 교회가 있는 솔안마을로부터 시작해 중간마을-서당마을-매름마을-너서리마을로 줄줄이 이어져 있다고 하여 줄포라는 농담도 생겼다. 줄포마을은 1413년(태종 13) 영천군 가흥면 줄배방에 속했으며 영주 시내에서 풍기 방면으로 10리 거리에 위치한 서북향의 마을이다. 조선시대에는 줄포마을을 영주 관아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서포리 또는 포상리라고도 불렀다. 마을 입구 도로변에 영주 관아에서 10리 이정표인 장승이 있었는데 이곳을 이름하여 장승뱅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그 이름만 남아 있다. 이곳은 지대가 낮고 늪이 많아 줄풀이 무성하여 줄밭을 이루고 있어서 마을 이름을 줄포(茁浦)라고 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풍기군 생현면 내줄동 일부를 통합해 상줄리가 되어 영주군 영주면에 편입됐다. 1940년 영주면의 읍 승격으로 영주군 영주읍 상줄리가 됐다가 1980년 영주읍이 시로 승격함에 따라 영주시 상줄동이 됐다. 상줄동은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가흥2동 관할이다. 유적으로는 호암사(扈菴祠), 검암정사(儉巖精舍), 봉강서당(鳳崗書堂), 희현당(希賢堂) 등이 있다.
영남의 명가 희현당 안협고택은 나주정씨 23세손 도정공(都正公) 정의철(丁義轍, 1791~1871)이 처음 지었다. 공은 일찍이 풍기군수, 형조판서를 지낸 종숙부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 1723~1801)로부터 학문을 깊이 익힌 다음 줄포로 돌아와 낡은 집을 헐고 와옥을 신축하여 당호를 ‘희현당’이라 했다. ‘희현’은 ‘선비는 현인(賢人)의 경지에 이르기를 바란다’라는 뜻이다. 도정공은 안팎으로 효도, 우애, 화목, 구휼 등에 힘을 쏟는 한편 봉강서당(1856)을 지어 풍부한 학식으로 자제들을 교육함으로써 향리의 번영을 도모하는 등 명실상부한 향토 선비로서 역할을 다했다. 또한 도정공의 손자 대직(大稙, 1847~1933)은 1882년(고종 19) 2월 희현당을 완성하고 택호를 안협택이라 했다. 대직은 사마시에 급제하여 의금부도사, 안협현감을 지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낙향하여 희현당 뒤 언덕에 정자를 지어 송오대(松梧臺)란 편액을 걸고 자선을 베풀어 원근 각지로부터 칭송이 자자했다. 어느 날 옹기장수가 안협택 앞을 지나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넘어짐으로써 옹기를 모두 깨트리고 말았다. 대식은 옹기장수를 불러 “오늘 운수가 나빠서 그랬지만 우리 집 앞에서 당한 낭패이니 어찌 나에겐들 연관이 없다 하겠소”라며 옹기값 전부를 보상해주었다. 그 무렵부터 안협택은 가문의 명성이 널리 전해져 영남의 명가로 자리 잡았다. ‘안협’이란 택호는 대직의 임지였던 안협[지금의 강원도 철원군 산하]에서 얻은 것이다. 그로부터 130년의 세월이 흘러 안협택은 낡고 허물어졌다. 이를 안타깝게 여겨오다가 정해창(丁海昌) 주손의 힘으로 원형이 보존된 목조 와가를 2011년 중수 완공했다. ‘담상판각(潭上板閣)’은 영주 희현당 안협택에서 기탁한 편액이다. ‘판각’이란 장판각(藏板閣)의 줄임말로, 집안의 목판을 보관하는 장소를 뜻한다.
줄포마을은 나주정씨의 집성촌으로 안협택 주변에는 그 후손들이 세운 검암정사(儉巖精舍)가 있다. 이 정사는 풍류보다는 교육활동을 많이 한 곳으로 널리 명성이 높고 나라의 인재를 많이 배출했다. 줄포마을 입향조인 나주정씨 검암공(儉巖公) 정언숙(丁彦璛, 1600~1693)은 1635년(인조 13) 안동부판관으로 원주로 오가는 도중에 영주를 지나다가 산천이 수려함에 이끌려 집을 빌려 살았다고 한다. 당시 정언숙은 영천[지금의 영주] 땅을 경유하여 안동부로 귀로할 때 창보역사[지금의 창진동]에서 서포리를 바라보니 그 풍광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또한 근방에 참다운 벗도 많아 마침내 1635년 줄포에 임시 거처하게 되었고 그 후손들이 이어서 줄포 땅에 정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언숙은 병자호란 후 벼슬에 뜻을 버리고, 영주의 서쪽 줄포에 집을 짓고 김응조(金應祖)·나이준(羅以俊) 등과 교류하며 유연자적했다. 그러다 1667년(현종 8) 원주로 이사하여 치악산 아래 검암리에 검암정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 후 정사가 퇴락하여 후손들이 “옛 자리는 아니지만, 검암공이 애상하여 머물렀던 곳이고 손수 심은 나무가 지금도 있으니, 치악산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하며, 1925년 줄포로 이건하였다. 검암정사가 배출한 정태진(丁泰鎭)은 이병호(李炳鎬)에게 글을 배우고, 자라서는 곽종석(郭鍾錫)에게 사사받아 성리학에 일가를 이뤘다. 1910년 나라를 잃자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1919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낼 때 대표로 참석하였다가 대구감옥에 갇히게 됐다. 출옥하여 검암정사를 중수하고 학문에 전념하자 원근의 많은 학도가 모여들어 후진 양성에 이바지했다. 줄포마을은 그 후 자손들이 번성하여 취락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나주정씨 종택을 중심으로 웃마을[속칭 매름마을], 아랫마을[속칭 솔안마을], 중간마을, 서당마을, 여아동 또는 여서리[속칭 너서리]로 마을을 이뤘다. 현재 90여 세대에 170여 명이 살고 있으며 30대에서부터 70대까지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노인회 등록 회원은 60여 명이 된다.

참고문헌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한국국학진흥원, 2016
  • 유교넷(http://www.ugyo.net/)

  • 영주시민신문-마을탐방[23] 가흥2동 줄포마을
  • (http://www.yjinews.com/news/articlePrint.html?idxno=31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