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재(是齋)
시재(是齋)는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동부리에 위치한 월천서당(月川書堂) 내에 게시한 편액이다. ‘시재’란 옳음을 추구하는 사람의 집이란 의미로, 배움을 통해 옳은 마음을 닦고 옳은 일을 행하라고 가르친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의 교육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조목이 1590년에 월천서당을 중수하면서 지은 기문에 이와 관련된 내용이 있어 옮겨 보기로 한다. “경자년(1540, 중종 35) 연간에 선군(先君)께서 세 칸의 집을 지었는데, 반은 기와로 짓고 반은 초가로 지어서 아이들이 글을 읽는 장소로 삼았다. 그 뒤로 훼손되는 대로 보수하여 혹은 덧붙이기도 하고 혹은 그대로 두었다가 올해(1950) 가을에야 비로소 문(門)과 창(窓), 당(堂)과 방(房)을 갖추었고, 동쪽에 처마를 덧대어 장서각(藏書閣)을 넓혔다. 대개 51년이 되었으나 세 칸의 집은 예전 그대로 하여 바꾸지 않았고, 또 선사(先師 이황)께서 쓴 월천서당 네 자의 큰 글씨와 성주목사 이묵재(李默齋)가 쓴 시재 두 자의 큰 글씨를 당(堂)과 재(齋)의 양쪽 문미(門楣) 사이에 나누어 걸었으니, 모두 멀리 사모함을 일으키고 깊은 생각을 깃들인 것이다. 또 나는 어릴 때부터 매우 책을 좋아하여 간혹 사거나 구하기도 하였고, 간혹 인출(印出)하거나 뜻밖에 임금이 하사하는 책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친구 중에서 나의 뜻을 아는 사람은 내가 구하기를 기다리지 않고서 보내주기도 하였다. 금년(1590) 가을에 시렁 위에 소장한 것을 조사하여 살펴보니 선대부터 전해오던 것을 합하여 대략 1,400여 권이나 되었다. 나는 다만 성품이 본래 어둡고 둔한데다가 게으름까지 더해지고 노쇠함까지 보태져서 앞으로 몇 편의 글을 보고 몇 겹의 의리를 통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게다가 늙고 졸렬한 나는 금년에 벌써 예순 일곱이 되었지만 다만 아이 중에서 수붕(壽朋)은 나이가 12세이고 석붕(錫朋)은 겨우 6세이니, 이들이 성장하여 잘 지키고 보관하여 이웃집에서 벽을 바르는 도배지로 사용되는 것을 면할 수나 있을까? 경인년(1590, 선조 23) 늦가을에 동고산인(東皐散人)이 월천서당에서 쓰다.”라고 하였다. 이로 보아 편액 글씨는 묵재(默齋)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이 쓴 해서체이다.
횡성조씨 월천종택(橫城趙氏 月川宗宅) 소개
조목의 본관은 횡성(橫城), 자는 사경(士敬), 호는 월천(月川)·동고산인(東皐散人)·부용산인(芙蓉山人)이다. 아버지는 참판 조대춘(趙大椿)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 권수익(權受益)의 딸이다. 3세에 글을 읽기 시작하였으며 12세에 사서삼경을 두루 섭렵하였다. 15세 때 퇴계 이황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학업에 더욱 정진하였다. 23세에 어머니 상을 당했는데, 효심이 지극해 이황은 대성할 그릇이 약관으로 몸을 상하지나 않을까 염려할 정도였다. 1552년(명종 7)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대과는 포기하고 독선일신(獨善一身)에만 매진하였다. 1566년 공릉참봉에 봉직되었으나 학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이황을 가까이 모시면서 경전 연구에 주력하였다. 그 뒤 성균관수천에 피선되고 집경전참봉에 제수되었으며, 1572년(선조5) 이후 동몽교관, 종부시주부, 조지서사지, 공조좌랑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76년 봉화현감에 제수되자 사직소를 냈으나 허락되지 않아 봉직하면서 향교를 중수하였다. 1580년 이후 전라도·경상도·충청도도사, 형조좌랑, 신녕현감, 영덕현령, 전생서주부, 공조정랑, 상서원판관 및 금산·단양·합천 등의 군수, 장원서장원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94년 군자감주부로 잠시 있으면서 일본과의 강화를 극력 반대하였다. 그 뒤 장악원·사재감·예빈시정, 공조참의, 공조참판 등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재덕과 노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내고 사퇴하였다. 그는 이황과 동향인 예안에서 출생, 성장하면서 일찍 이황의 문하생이 된 후 일생 동안 가장 가까이에서 스승을 모신 팔고제(八高弟)의 한 사람이다. 이황 사후에 퇴계 문집의 편간, 사원의 건립 및 봉안 등에 있어서 항상 성의를 다했고 마침내 도산서원 상덕사에 유일한 배향자가 되었다.월천마을은 현 동쪽 7리에 있다. 용두와 영지 두 산이 이어져 내려와 서로 나솟아 부용봉이 되었다. 그 아래에 마을이 있으니 바로 월천이다. 옛날에는 사는 사람이 없어서 초목이 무성하고 원숭이와 토끼들이 서로 떼지어 다녔다. 이 때문에 옛부터 세속에서 마을 이름을 전하기를 솔내(率乃)라고 하였다. 부라촌(浮羅村 지금의 부포)에서 태어난 동지중추부사 권수익(權受益)이 매번 이곳의 빼어난 경치를 보고서 옮겨와 살려는 생각이 있어 1494년 가시나무를 베어내고 터를 닦아서 기거하였다. 그때 옛 이름인 솔내를 고쳐 월천이라고 하였다. 또한 권수익의 외손인 조목이 이 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월천으로 호를 삼고 이곳을 대라(帶羅)라고 하였는데 부라(浮羅)와 짝해서 불렀다고 한다. 조목이 월천서당에 읊은 시 한 수를 소개하기로 한다.
영지산 남쪽의 빼어난 푸른 부용봉옥처럼 우뚝 서서 세상에서 제일이네돌아드는 물줄기는 만고토록 흐르고감싸 안은 봉우리들 절로 수천 겹이네연못의 달빛은 경치가 끝이 없고집 뒤의 소나무는 풍상에도 변치 않네육십년 동안 유유자적 서성이며한가로이 창가 앉아 앞산을 바라보네
靈芝南秀碧芙蓉玉立亭亭絶世容一水環廻流萬古群巒屛擁自千重無邊景致潭心月不變風霜屋後松偃仰徘徊年六十小窻閒坐數前峯
월천서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ㅡ자형 건물로 중앙에 2칸의 마루를 두고 좌우에 통간방을 배치한 홑처마집이다. 기둥은 방주이며 흘림을 두고 그에 따라 벽선이 그렝이가 되었다. 어간대청 전면의 문얼굴에는 당판문이 달렸는데, 중반과 하반에 널빤지를 끼우고 윗부분엔 넉살무늬를 구성하였다. 이는 쉽게 볼 수 없는 고형에 속한다. 대청의 좌측 방 북벽에 감실이 고미다락처럼 구성되어 신위(神位)를 봉안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가난한 선비의 가묘 형태이다. 월천서당은 1982년 12월 1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41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참고문헌- 『월천집月川集』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
- 이종호, 『월천 조목의 삶과 생각 그리고 문학』, 한국국학진흥원,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