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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남정사(鶴南精舍)

경주이씨 학남정사慶州李氏 鶴南精舍

71.2×237.0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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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학남정사(鶴南精舍)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71.2×237.0
  • 건물명 학남정사(鶴南精舍)
  • 공간명 경주이씨 학남정사慶州李氏 鶴南精舍
  • 서예가
  • 위치정보 경북 포항시 북구 기계면 문성리 6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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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남정사(鶴南精舍)

학남정사(鶴南精舍)



학남정사(鶴南精舍)는 학남(鶴南) 이회경(李晦慶, 1784~1866)이 포항 기계에 건립한 정사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경주이씨(慶州李氏) 학남정사에서 기탁한 자료로, 크기는 가로 237㎝, 세로 71.2㎝이다. ‘학남’은 ‘비학산의 남쪽’이란 뜻으로, 학과 함께 천 길 푸른 절벽을 날아 속세의 티끌을 멀리하여 정신과 마음을 수양하겠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회경은 평소 산수를 좋아하여 중년에 우거지를 시냇가로 옮겨 연못을 파고 연을 심고서 시냇가에 영암정(靈巖亭)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또 월봉이 마주 보이는 곳에 초정(草亭)을 짓고 ‘학남정(鶴南亭)’이라 편액하였다. 또 만년에는 큰 골짝 깊은 곳에서 집을 짓고 검우(儉宇)라 이름하였다. 이회경은 정미년(1847) 3월에 옥동 분암에서 학남의 초려(草廬)로 이거하였는데 이때 족제(族弟) 이수경(李秀卿), 권병균(權秉均), 이재근(李在根)과 함께 정자 주변을 서성이다가 달을 완상하고 술을 마시면서 곧장 네 번에 걸쳐 왕복으로 번갈아 수창하였는데, 첫 부분만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산정에서의 멋진 벗들과의 모임 山亭勝友會
좋은 시절에다 또 단오절이네 佳節又端陽(이회경)

백발 되어 서로 만나는 이곳 白首相逢地
푸른 이내 이는 산에 해가 지네 靑嵐落照岡(이수경)

술잔 기울이며 기쁜 정을 나누고 歡情傾杜酌
시 주머니 차고 멋진 흥치 뽐내네 逸興佩奚囊(권병균)

대화는 진(秦)·진(晉)나라처럼 꽤 친밀하나 話誼兼秦晉
지은 시가 한(漢)·당(唐)나라에 부끄럽네 覓詩愧漢唐(이재근)


글씨는 의재(毅齋) 민병석(閔丙奭, 1858~1940)이 쓴 해서체이다. 원필로 부드럽게 결구한 ‘학(鶴)’ 자가 날개를 잠시 접고 고요하게 앉은 학의 자태처럼 우아하다. 비학산 남쪽의 정갈한 터에 자리하고 있음을 부드럽지만 묵직한 ‘남(南)’ 자가 햇살 가득 머금은 너른 마당인 양 따뜻하다. 정감 넘치는 붓이 강약을 섞어가며 무심하게 ‘정(精)’ 자를 이루어내는데 좌우가 서로 껴안은 듯 품이 다정하다. 그 정을 담는 그릇인 듯 단아하게 서 있는 ‘사(舍)’ 자가 편안하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경주이씨 학남정사慶州李氏 鶴南精舍 소개



이회경(李晦慶, 1784~1866)은 자가 서구(敍九), 호가 학남(鶴南), 본관이 경주(慶州)이다. 여말의 이존사(李存斯)는 문과에 합격하고 교감을 역임한 석탄(石灘) 이존오(李存吾, 1341~1371)의 아우이다. 이분이 이량(李良)을 낳았는데 조선조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판서를 지냈다. 3대를 지나 이말동(李末仝, 1443~1518)은 성화 경자년에 사마양시에 합격하여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동방계(同榜契)에 참여하였고 호가 도원(桃源)인데, 비로소 포항 기계로 이거하였다. 이분이 이종간(李宗幹)을 낳았는데 참봉을 지냈고, 이분이 이습(李熠)을 낳았는데 직장을 역임했고 호가 두곡(杜谷)이다. 이분이 이복성(李復性)을 낳았는데 첨정을 지냈다. 고조 이도겸(李道謙, 1677~1718)은 호가 구봉(九峯)인데 효행으로 동몽교관에 증직되었다. 증조는 이홍정(李弘禎)이고, 조부는 이명룡(李命龍)이며, 생조는 이필룡(李弼龍)이다. 부친은 이양덕(李養德)인데 중부의 후사를 이었다. 어머니는 전주류씨(全州柳氏) 백졸암(百拙庵) 류직(柳㮨)의 6세손이고 사인(士人) 류봉래(柳鳳來)의 딸이다.
대여섯 살에 독서할 줄 알아 책을 끼고 족대부 한와(閒窩) 이시일(李時逸, 1731~1792)에게 수업하였는데, 한와공이 가르치다가 기뻐하면서 “이 아이의 뜻은 오히려 구차하지 않으니 문호를 성대하게 할 것이다.” 하였다. 10여 세에 홀로 앉아서 독서를 하고 있었는데, 어떤 과객이 집에 와서 밥을 먹고 나서 그 밥그릇을 거두어 가버렸어도 공은 못 본 척하였다. 여종이 상을 치우러 왔다가 깜짝 놀라 괴이하게 여김에 공이 천천히 말하기를 “밥그릇이 진정 있었던가?”라고 하였다. 다음 날 아침에 객이 와서 밥그릇을 돌려주면서 “명망을 들어 알고 있었기에 시험을 해본 것이오. 과연 헛소문이 아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19세에 호곡(壺谷) 류범휴(柳範休)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깊은 장려(獎勵)와 허여(許與)를 받았는데, 이후 편지로 강하고 질문한 것을 기록한 것이 『입설록(立雪錄)』이다.
일찍이 당질 이운정(李運楨, 1819~1893)에게 말하기를 “학문하는 방법은 장구(章句)를 찾고 밝히는 것에 있지 않고, 요점은 내면을 향해 자신에게 간절하게 하는 것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라고 하였다. 약관 무렵에 매곡서사(梅谷書社)에 가서 강회하였는데 남와(南窩) 정동필(鄭東弼)이 강장이 되어 『대학(大學)』의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視而不見 聽而不聞]”라는 구절을 강하였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시청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나 공만 견문(見聞)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어찌 마음을 두지 않고서 눈으로만 보이고 귀로만 들을 수 있는 이치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모두가 추복하였다. 저서에는 『조문록(朝聞錄)』·『이학총도(理學總圖)』·『홍범도설(洪範圖說)』·『천화도(天花圖)』·『연우문답(蓮友問答)』·『이문록(異聞錄)』·『원시(原始)』 등이 있다. 경주이씨 교남공파 종부 김중임은 남편이자 종손인 이덕형이 한국전쟁 때 피난길에서도 보존하여 학남정사에 보관해오던 고문헌 2,760점을 국립중앙도서관에 기탁하였다.
이회경이 읊은 「학남팔영(鶴南八詠)」이란 시가 있는데, 연못의 맑은 물결[方塘鏡坡], 작은 냇가의 금빛 모래[小澗金沙], 언덕 가의 외로운 소나무[岸邊孤松], 둑 위의 드리운 버드나무[隄上垂柳], 용산의 맑은 이내[龍山晴嵐], 학동의 저녁연기[鶴洞暮煙], 화대의 평편한 숲[和垈平林], 달성의 먼 포구[達城遠浦]를 차례로 노래하였다. 이 가운데 첫째 시를 소개하기로 한다.

한밤중에 옷깃 여미고 다시 배회하나니 整襟中夜復低佪
닭이 우니 물가 정자에 새벽빛이 열리네 水閣雞鳴曙色開
고요해진 뒤의 진심을 어느 곳에서 볼까나 靜後眞心何處見
거울 같은 작은 연못 티끌 하나 없이 맑네 小塘如鏡絶纖埃

참고문헌
  • 이회경(李晦慶), 『학남문집(鶴南文集)』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한국국학진흥원, 2016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 유교넷(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