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수재(聿修齋)
율수재(聿修齋)는 홍종린(洪鍾麟, 1863~1941)의 묘소를 지키고 제사를 올리기 위하여 아들 홍순학(洪淳學, 1897~1964)이 1945년에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강교리(판교)에 건립한 재사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경주 남양홍씨(南陽洪氏) 동와공파 판교문중에서 기탁한 자료로, 크기는 가로 115.8㎝, 세로 55㎝이다. ‘율수’는 ‘조상의 덕을 닦는다’는 의미로, 『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文王)」에 “너의 할아버지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 덕을 닦을지어다. 길이 천명(天命)에 짝하는 것이,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는 길이니라.[無念爾祖 聿修厥德 永言配命 自求多福]”라고 한 데서 취한 말이다. 성대한 복은 밖에서 구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조상의 덕을 닦으면 저절로 구해진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소개
이기희(李紀曦, 1863~1953)가 1945년 7월에 지은 「율수재기(聿修齋記)」에는 율수재가 위치한 공간적 배경, 건립한 연도와 구조 그리고 편액의 명칭과 의미 등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율수재는 1943년 4월에 시작하여 1945년 1월에 완공하였다. 모두 3칸으로 좌우에는 방으로 하였고 가운데는 대청마루를 두었다. 기와를 두껍게 덮고 담장을 빙 둘렀으며, 남쪽에 초옥을 만들어 묘지기로 하여금 그 재사를 수호케 하였다. 재사를 율수재라 한 것은 홍순학(洪淳學, 1897~1964) 이기희에게 기문을 청하러 왔을 때 친구 조병하(曺秉夏)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기에 그에게 편액에 대한 의견을 물어 정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기희는 ‘율수’가 『시경』에서 유래한 말임을 언급하면서 율수에 대한 부연적인 설명을 곁들이고 있다.조상의 덕을 닦는 방법은 효를 우선으로 해야 한다. 효는 또 정성을 근본으로 해야 한다. 홍군(洪君 홍순학)이 이미 그 비석에 명을 새겨 숨겨진 덕을 천양하였으며, 또 이 재사를 건립하여 묘전(墓奠)을 받들었으니 그 정성과 효행이 지극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이것보다 큰 것이 있다. 먼저 공은 이미 덕을 쌓고 인을 실천하여 후손들에게 남겨주었으니, 이것을 잇고 지키는 책임은 홍군에게 있지 않겠는가. 그 일은 다른 것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덕을 닦는 것에 있다. 덕은 또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이며 또한 남양홍씨(南陽洪氏)가 대대로 전수한 것이다. 비유하자면 가까이 있는 나뭇가지를 멀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니 그 일이 쉽다고 해서 스스로 다스림을 소홀히 해서도 안 되고, 또 그 일이 어렵다고 해서 스스로 한계짓는 것에 편안해서도 안 된다. 오직 항상 스스로 경계하고 깨어있으면서 심신을 새롭게 하고 새롭게 해야만 안배(安排)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덕을 닦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시종 게을리함이 없이 위로는 선조의 덕을 계술(繼述)하고 아래로는 후손들에게 덕을 드리워서 후손들로 하여금 먼 조상을 추모하며 덕을 두터이 한다면 아마 재사에 명명한 뜻을 저버리지 않게 될 것이고, 앞서 말한 이것보다 큰 것이 있다는 것에 가깝게 될 것이다. 생각해보면 공은 나와 동갑내기로서 사는 곳도 같아서 평소에 마음으로 서로 따르면서 지냈는데 갑자기 무덤에 묻힌 지 몇 년이 되었다. 지금 공의 재사에 기문을 지으려니 나도 모르게 슬픔이 밀려온다. 이 때문에 홍군의 청을 사양하지 못하고 위와 같이 대략 서술한다. 홍순학이 율수재 건립을 완공하고 나서 읊은 시가 있어 소개한다.늦게서야 몇 간의 집을 짓고 나니 晩營結構數間成추모하는 마음 더욱 간절해지네 寓慕之懷倍切生학수의 봄 이내는 별천지이고 鶴峀春嵐濃別界작계의 가을 물은 찌든 마음 씻어주네 鵲谿秋水滌塵情들보에 바람이 부니 어찌 상쾌하지 않으랴 樑風微動寧無感창문의 달이 높이 뜨니 절로 밝구나 牕月高浮自有明내가 어찌 감히 뜻을 이었다고 하리오 不肖敢云能繼述
항상 율수의 명칭을 두려워할 뿐이네 恒時惟恐聿修名참고문헌-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한국국학진흥원,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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