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교당(興敎堂)
흥교당(興敎堂)은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 1520~1588)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산야동에 건립한 용계서원(龍溪書院) 강당의 편액이다. 용계서원은 1778년(정조 2)에 창건되어 김언기의 조부인 담암(澹巖) 김용석(金用石, 1453~1523)과 김언기의 벗인 인재(忍齋) 권대기(權大器, 1523~1587) 등을 배향하였다. 이 편액은 광산김씨(光山金氏) 유일재종택에서 기탁한 것으로, 크기는 가로 107.5㎝, 세로 51.5㎝이다. 용계서원의 사당은 존학사(尊學祠)이고, 동재(東齋)는 성극재(省克齋)이고, 서재(西齋)는 직방재(直方齋)이다. ‘흥교’는 ‘오교(五敎) 즉 오륜(五倫)을 진작시킨다’라는 말이다. 오교는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의 5가지 교화를 말한다. 『서경』 「순전(舜典)」에서 순임금이 말하기를 “설아! 백성이 친목하지 않고 오륜을 따르지 않으므로 너를 사도로 삼으니, 공경히 다섯 가지 가르침을 펴되 너그럽게 하라.[契 百姓不親 五品不遜 汝作司徒 敬敷五敎 在寬]”라고 하였다. 여기에는 유일재 김언기의 학문을 진흥시키고 후학을 양성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광산김씨 유일재종택光山金氏 惟一齋宗宅 소개
용계서원(龍溪書院)이 있는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산야동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물야동·산동, 동후면 구접리·우곡리를 병합하고 산동의 ‘산(山)’ 자와 물야의 ‘야(野)’ 자를 따서 산야동이라 하였다. 지명과 관련한 기록으로는 『와룡면지(臥龍面誌)』에 “산야동은 옛날에 산동이라 하였고, 가구에서 5리쯤 되는 곳에 있다. 산은 높고 골은 깊다. 물야촌은 부성에서 동쪽으로 10리쯤에 있다. 동악산의 동쪽으로 산과 내로 둘러싸였으며 사족이 많이 산다. 『영가지(永嘉誌)』에 나와 있다.”라고 되어 있다. 안동댐 건설로 말미암아 마을 일부가 수몰되었다. 1995년 안동군이 안동시와 통합되면서 안동시 와룡면 산야리가 되었다. 산야리에 용계서원이 세워진 이유는 이곳에 김언기(金彦璣, 1520~1588)의 묘소가 있기 때문이다.광산김씨(光山金氏)는 전라도 광산[지금의 광주시]의 토성으로 고려 후기 왕경에 진출하여 관료를 배출한 명문 가문이다. 광산김씨는 문정공파, 문숙공파, 양간공파, 낭장동정공파, 사온직장공파의 5개 문파로 나누어진다. 안동 광산김씨는 주로 오천, 구담, 가구 등 3곳에 뿌리를 내려 세거하였다. 이들은 모두 고려 충렬왕 때 형부상서를 지낸 14세 양간공 퇴촌(退村) 김연(金璉, 1214~1291)의 손자 김진(金稹)이 계승한 양간공파에서 나온 분파이다. 오천에는 김진의 5남인 김천리(金天利)를 계승하는 분파가, 구담과 가야에는 김진의 차남인 김영리(金英利)를 계승하는 분파가 자리 잡았다. 그래서 오천에는 김효로(金孝盧, 1455~1534)가 예안의 오천에 입향하면서 광산김씨 예안파를 형성하였고, 구담과 가야에는 김영리 계열의 김용석(金用石)이 스승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당한 무오사화를 보고 안동의 구담으로 입향한 뒤 그 손자 김언기가 처가를 따라 오천리 근처의 가야리로 이거하면서 퇴촌공파로 정착하게 되었다.김언기는 자가 중온(仲昷), 호는 유일재(惟一齋),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인 김용석의 손자이고, 이황(李滉)과 동방(同榜) 합격한 김주(金籌)가 부친이다. 모친 순흥안씨(順興安氏)는 안처정(安處貞)의 딸이다.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한 그는 풍산현 구담리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을 따라 안동부 와룡면 이계[지금의 이상리]로 이거하였다. 그리고 만년에 와룡의 가야에 집터를 정해 정착하였는데, 1561년(명종 16) 서당 모재를 짓고 제자를 양성하였다. 당시 문도가 수백 명에 이르렀으며, 김언기의 학덕에 대해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은 “복주의 문학 흥성은 선생의 창도에 힘입은 바가 크다.[福州文學之盛 多自先生唱導云]”라고 평가했다. 1567년(명종 22) 생원시에 합격한 뒤로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1571년(선조 4) 영해교수로 제수되었을 때 영해 향교의 강당을 수리하고 학교의 규약을 밝히고 학생을 장려하고 인재를 배양하는 등 교육에 힘썼다. 1573년(선조 6) 여강서원을 창건하여 이황을 배향할 때 여강서원의 초대 원장이 되었다. 백담(柏潭) 구봉령(具鳳齡),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 지산(芝山) 김팔원(金八元) 등과 교유하며 강학하였다. 비지(賁趾) 남치리(南致利), 지헌(芝軒) 정사성(鄭士誠) 등의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초취부인 영양남씨(英陽南氏) 남세용의 딸 사이에 1남 2녀를 두고, 후취부인 영천이씨(永川李氏)와는 2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김득연(金得硏, 1555~1637), 김득숙(金得肅, 1561~1589), 김득의(金得礒, 1570~1625)이다. 유일재종택은 첫째 김득연의 후손이 이어가고 있다. 김언기의 묘소는 와룡산 남쪽 기슭 축좌언덕에 있다. 저술로 2권 1책의 『유일재선생실기(惟一齋先生實記)』가 있다.용계서원은 1778년(정조 2) 선생의 문인들과 후손들이 보덕사를 세워 선생을 제향하고 인재(忍齋) 권대기(權大器, 1523~1587)를 추향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지금까지 복설되지 못하고 있다. 서원 맞은편 언덕 김언기의 묘소 아래에 보덕단을 세워 매년 3월 초정일에 향사를 지낸다. 현재는 강당 건물 1동과 부속 건물 1동이 남아 있다. 강당은 막돌초석 위에 사각의 주초를 놓고 각주를 세운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중앙에 4칸의 마루를 두고 좌우에 2칸의 온돌방을 배치한 간결한 구조의 건물이다.
참고문헌- 한국국학진흥원, 『한국국학진흥원소장 국학자료 목록집10 광산김씨 유일재종택』, 한국국학진흥원, 2011
- 이광정(李光庭), 「김언기 행장(金彦璣行狀)」, 『눌은집(訥隱集)』 권19유교넷-목판아카이브(http://mokpan.ugyo.net/hyunpan/)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한국국학진흥원,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