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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습당(時習堂)

문화류씨 서산공파 참판공종중文化柳氏 瑞山公派 參判公宗中

48.0×102.5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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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시습당(時習堂)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48.0×102.5
  • 건물명 시습당(時習堂)
  • 공간명 문화류씨 서산공파 참판공종중(文化柳氏 瑞山公派 參判公宗中)
  • 서예가
  • 위치정보 울산광역시 북구 양정1길 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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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습당(時習堂)

시습당(時習堂)



시습당(時習堂)은 류광선(柳光先, 1512~1579)의 학덕을 기리고 추념의 정성을 표하기 위하여 건립한 만풍정(晩楓亭) 정자 내 당(堂)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문화류씨(文化柳氏) 서산공파 참판공종중에서 기탁한 것으로, 크기는 가로 102.5㎝, 세로 48㎝이다. ‘시습’은 『논어』 「학이(學而)」에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주자는 주석에서 “습은 새가 자주 나는 것이니, 배우기를 그치지 않음을 새가 자주 나는 것과 같이하는 것이다.[習 鳥數飛也 學之不已 如鳥數飛也]”라고 풀이하였고, 또 “사람의 본성은 모두 선하나 이것을 앎에는 먼저 하고 뒤에 함이 있으니, 뒤에 깨달은 자는 반드시 먼저 깨달은 자의 행위를 본받아야 한다.[人性皆善 而覺有先後 後覺者必效先覺之所爲]”라고 설명하였다. 『맹자』 「만장(萬章) 상(上)」에 “하늘이 이 백성을 내심은 먼저 안 사람으로 하여금 늦게 아는 사람을 깨우치며, 선각자로 하여금 뒤늦게 깨달은 자는 깨우치게 하신 것이다.[天之生此民也 使先知覺後知 使先覺覺後覺也]”라는 말이 있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우측 하단 ‘촌(寸)’에서의 다소곳한 점과 좌측 ‘일(日)’ 안의 점이 우상향으로 평행한 가로획의 단조로움에 신선하게 도발하여 지루함을 날려버린다. 열심히 공부한 것을 실천하며 체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려는 듯이 더욱 무거워진 붓이 ‘습(習)’ 자를 시작한다. ‘우(羽)’의 짱짱한 외곽선 안에 다소 가늘지만 결기 있는 사선 넷이 한 방향으로 곧게 뻗어 있어 반복해서 익히는 수련의 과정을 보는 것 같아서 숙연하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문화류씨 서산공파 참판공종중(文化柳氏 瑞山公派 參判公宗中) 소개



류광선(柳光先, 1512~1579)은 문화류씨(文化柳氏) 울산 입향조로, 자가 국빈(國賓), 호가 만풍정(晩楓亭)이다. 중부 평간공(平簡公) 류지(柳輊)로부터 지결(旨訣)을 얻었고, 그가 물려준 수리(數理)에 관한 책과 육도삼략(六鞱三略)에 이르기까지 두루 통하였다. 1533년(중종 28)에 삼화현령에 제수되었고, 1541년(중종 36)에 형조참의가 되었으며, 1543년(중종 38)에 가선대부에 올라 형조참판이 되었다. 1545년(명종 1)에 직언으로 임금의 뜻을 거슬러 울산에 유배되었는데, 풀려나서 다시 벼슬길에 나설 뜻이 없어 그대로 울산에 은둔하며 지냈다. 1576년(선조 9)에 고라[지금의 포항시 죽장면 일대로 추정] 별장을 경영하고 묘우를 세웠고, 둘째 아들 류정(柳汀, 1537~1597)에게 심원에 별장을 꾸리도록 하였다. 1579년(선조 12) 병상에 있을 때 1590년(선조 23) 섣달에 고라로 가묘를 옮기라는 유언을 남겼다.
중부 류지는 1453년(단종 1)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교리·경상도관찰사·도승지·예조판서를 지냈고, 좌리공신에 책록되었으며, 문양군에 봉해지고 평간(平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류광선의 장남 류지(柳沚)는 자가 심원(深源)이고 통덕랑이다. 차남 류정은 자가 여원(汝元), 호가 송호(松壕)이며, 1546년(명종 2) 부친 류광선을 따라 울산으로 낙남하였다. 류지의 아들 류백춘(柳伯春, 1562~1600)은 자가 영형(領亨), 호가 제호(霽湖)이다. 성성재(惺惺齋) 금난수(琴蘭秀)에게 수학하였고, 임진왜란 때 류정의 휘하에서 줄곧 참전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유문으로는 숙부의 시에 차운한 시가 첨부되어 있고, 숙부가 순절한 뒤 이어서 쓴 일기가 있다. 류정의 아들 류영춘(柳榮春, 1552~1594)은 호가 나암(蘿巖)이다. 부친을 따라 임란에 참전하다가 창암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류정의 손자 류태영(柳泰英, 1567~1636)은 자가 자실(子實), 호가 지헌(智軒)·지와(芝窩)이다. 소년으로서 조부와 부친의 전투에 종군하였고, 병자호란 때 쌍령에서 순절하였다. 1835년(헌종 1) 양산군 산막동에 칠현사를 창건하여 류자미·류광선·류정·류영춘·류백춘·류득춘·류태영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하였는데, 철향(輟享)되었다가 1963년에 복설하였다가 최근에 다시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구소석3길 39로 이건하였다. 1911년에 『사의사실기(四義士實記)』가 간행되었고 1939년에 『칠현사지(七賢祠誌)』가 간행되었다.
1960년에 인암(刃庵) 권상규(權相圭, 1874~1961)가 지은 「만풍정기(晩楓亭記)」에는 류광선이 울산에 정착하게 된 배경과 만풍정(晩楓亭)과 시습당(時習堂)이 건립되게 된 경위가 기술되어 있다.

정자는 울산 양정리에 있다. 뒤에는 무룡악 형제봉 삼산(三山)이 있으며 두 물줄기가 안산으로 향하고 큰 바다가 그 외부를 감싸고 있다. 대개 맑은 기운이 모여 있는 곳으로 문화류씨가 사는 곳이다. 류씨의 선대에 만풍정 선생(晩楓亭先生 류광선)이 있었는데 단종 때 충렬(忠烈)을 지킨 서산 선생(西山先生 류자미)의 손자이다. 일찍이 정의롭고 올곧게 살라는 가르침을 받들어 법도에 맞게 자신을 단속하였다. 경전(經傳)에 침잠하여 통달했으며 널리 상수학과 병법서도 두루 섭렵하였다. 중종·인종·명종 세 임금을 섬기었으며 청요직을 거쳐 벼슬이 병조좌랑이 이르렀다. 명종 초기에 직언(直言)으로 임금의 뜻을 거슬러 울산으로 유배되었다. 해배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갈 뜻이 없어 그대로 울산에 살면서 고라(古羅)와 심원(深源)에 별장을 두었는데 지금 고라와 심원의 위치를 알 수 없다. (중략) 그 제도는 가운데는 당(堂 시습당)으로 하고 양쪽 협실(夾室)은 방으로 하였다. 담장을 둘렀고 가운데는 출입문으로 하였다.

참고문헌
  • 안정, 「‘송호유집(松壕遺集)’ 해제」, 『(국역) 송호유집』, 한국국학진흥원, 2015
  • 권상규(權相圭), 「만풍정기(晩楓亭記)」,『인암집(忍庵集)』 권9
    이환두(李煥斗) 찬, 「유사(遺事)」, 『칠현사지(七賢祠誌)』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목판아카이브(http://mokpan.ugyo.net/hyunpan/)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한국국학진흥원,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