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림헌(淸臨軒)
청림헌(淸臨軒)은 경상북도 안동시 남후면 광음리 34번지에 위치한 고산서원(高山書院) 강당인 호인당(好仁堂) 서쪽 방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한산이씨 대산종가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98㎝, 세로 46.5㎝이다. ‘청림(淸臨)’은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동쪽 언덕 올라가서 휘파람 불고, 맑은 물가 굽어보며 시를 짓네[登東皐以舒嘯 臨淸流而賦詩]”라고 한 데서 취한 말로, 임청각(臨淸閣)과 같은 의미이다. 고산서원은 18세기 영남(嶺南) 사림(士林)의 종장이었던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의 학문과 덕행을 높이 기리고자 건립되었다. 이상정은 일찍이 푸른 벼랑에 맑은 물이 비치는 고산(高山)의 승경(勝景)을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나이 57세 때인 1767년(영조 43)에 비로소 여기에다 3칸의 고산정사(高山精舍)를 짓고 개인 수양과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이후 이상정이 세상을 등지자 1789년(정조 13)에 지방 유림들이 이상정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고산서원을 건립한 것이다. 한편 1985년 유림의 공의로 이상정의 아우인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 1714~1789)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고산서원은 경상북도 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향사는 3월 초정일(初丁日)에 거행하고 있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행서체이다.
한산이씨 대산종가(韓山李氏 大山宗家) 소개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은 본관이 한산(韓山)으로 고려조의 대학자인 목은(牧隱) 이색(牧隱, 1328∼1396)의 15세손이다. 자가 경문(景文)이며 성은 이씨(李氏)인데 한산인(韓山人)이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외손(外孫)인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 1595∼1660)의 현손(玄孫)이다. 증조는 이효제(李孝濟)이고, 조부는 이석관(李碩觀)이며, 아버지는 이태화(李泰和)이고, 어머니 재령이씨(載寧李氏)는 밀암(密菴) 이재(李栽, 1657~1730)의 딸이다. 이상정은 1711년(숙종 37) 1월 29일에 안동시 일직면 소호리에서 태어났다. 이상정은 이황(李滉) 이후 기호학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침체된 영남학파에서 이황의 계승을 주창하고 일어난 이현일·이재로 이어진 영남 이학파의 중추적 인물이다. 이상정은 외할아버지 이재를 통해 영남 이학파의 학풍을 계승하는 한편, 그 근원이 되는 이황의 사상을 계승하고 정의하는 입장에서 사상적 터전을 마련하였다. 특히 이황의 존리적(尊理的)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독성학집요(讀聖學輯要)』 등의 저술을 통해 이기를 대등하게 보는 기호학파의 태도를 거부하였다.한편 이황의 존리적인 태도를 하나의 이념으로 받아들여 일방적인 주리론을 펴는 것을 반대하고, 이(理)의 동정(動靜)과 이기(理氣)의 선후(先後) 등이 가지는 의미를 해명하고 본뜻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성명이기(性命理氣)에 대한 논의보다는 덕성을 배양하는 일용궁행(日用躬行)의 실천적 공부에 치중해야 함을 강조하였고, 일용평상(日用平常)의 도리인 유학의 본지로 돌아가는 일을 몸소 실천하였다.이상정은 학문에 크게 힘써 문장·율려(律呂) 등 제도문물에 대하여 연구하고 경학에 침잠하였다. 저서 및 편저로는 『사례상변통고(四禮常變通攷)』·『약중편(約中編)』·『퇴도서절요(退陶書節要)』·『심동정도(心動靜圖)』·『이기휘편(理氣彙編)』·『경재잠집설(敬齋箴集說)』·『심무출입설(心無出入說)』·『주자어절요(朱子語節要)』·『밀암선생연보(密庵先生年譜)』·『심경강록간보(心經講錄刊補)』·『연평답문속록(延平答問續錄)』 등이 있다.이상정은 18세기 영남 남인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로,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 1705~1786), 남야(南野) 박손경(朴孫慶, 1713~1782)과 함께 ‘영남삼로(嶺南三老)’로 일컬어진 인물이다. 이상정은 퇴계(退溪) 이황(李滉)→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밀암(密菴) 이재(李栽)로 이어지는 퇴계학을 집대성하여 소퇴계(小退溪)로 일컬어졌다. 이상정에 의해 집대성된 퇴계학은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으로 이어지는 계통과, 성리학적 사유체계에 있어서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한편 이광정(李光靖, 1714~1789)은 자가 휴문(休文)이고, 호가 소산(小山)으로 대산 이상정의 아우이다. 외조부인 밀암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735년(영조 11)에 증광향시, 1740년(영조 16)에 동당향시에 합격하였으나 전시에 불리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 뒤 1753년(영조 29) 어사가 영남의 인재 세 사람을 추천하였는데 그중 한 사람으로 뽑혔고, 1783년(정조 7) 국왕 정조가 “이상정의 아우 광정이 학문과 행검(行檢)으로 도내에 알려져 그 형의 풍도를 지녔다 하니, 가상한 일이다”라고 하며 이조에 명해 기용토록 분부하였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784년(정조 8)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고, 1785년(정조 9)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1789년(정조 13) 7월 25일 대산서당(大山書堂) 만완재(晩翫齋)에서 별세하였으니, 향년 76세였다. 선영이 있는 군위현 북쪽 모로동 갑좌 언덕에 장사지냈다. 이광정은 공맹(孔孟)의 경서와 정주(程朱)의 글을 외우고 사색하였으며, 박학(博學)·심문(審問)·신사(愼思)·명변(明辨)의 지적탐구는 오로지 독행(篤行)을 위한 것으로 보아 실천을 중시하고, 평상의 도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하였다. 또한 사(私)를 온갖 병폐와 악행의 근본으로 여겨 이를 타파하는 것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요체로 삼았다. 형 이상정이 운명하자, 원근(遠近)의 학자들이 모두 이광정에게 귀의하여 가르침을 청하였다.고산서원(高山書院)은 경행사(景行祠), 호인당(好仁堂), 백승각(百勝閣), 청림헌(淸臨軒), 면앙루(俛仰樓)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인 경행사와 강당인 호인당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법식에 따라 배치되었고, 우측으로 ‘ㅁ’ 자형 관리사가 자리하고 있다. 전면 좌측에는 고산정사(高山精舍)가 있어 도산서원(陶山書院)의 역락서재(亦樂書齋)를 연상하게 한다. 경행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측면에 창을 둔 외1출목 이익공(二翼工) 계열이며 맞배지붕집이다. 호인당은 우측에 2칸 온돌방을 두고 8칸의 넓은 마루를 놓아 전면의 풍광을 즐길 수 있도록 시원하게 만들었다.전면 좌우에 자리하고 있는 백승각과 청림헌은 전퇴칸을 둔 정면 6칸, 측면 1.5칸의 규모이다. 백승각과 청림헌은 향교의 동재·서재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건물이나 현재는 서고로 사용하고 있다. 백승각은 팔작지붕으로 처리한 반면 청림헌은 ‘工’ 자형 지붕으로 모양을 달리하고 있다. 청림헌 뒤쪽에 자리하고 있는 관리사는 경상북도 안동지방의 반가(班家) 형식인 ‘ㅁ’ 자형 평면이나, 관리사의 기능에 적합하게 부엌·고방 등의 수장공간을 많이 확보하고 있다.
참고문헌- 「대산 이상정의 시세계 연구」(안동대 석사학위논문)
- 이상정(李象靖), 『대산선생문집(大山先生文集)』
- 이광정(李光靖), 『소산선생문집(小山先生文集)』
- 안동문화원, 『안동오면 뵈줄게』
- 안동문화원, 『안동의 문화유산』
- 안동민속박물관, 『안동의 지명유래』
- 안동민속박물관, 『안동의 현판』 상권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 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