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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산정(泥山亭)

의성김씨 귀미 오우당공파義城金氏 龜尾 五友堂公派

52.2×140.0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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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니산정(泥山亭)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52.2×140.0
  • 건물명 니산정(泥山亭)
  • 공간명 의성김씨 귀미 오우당공파(義城金氏 龜尾 五友堂公派)
  • 서예가
  • 위치정보 안동시 일직면 귀미리 3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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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산정(泥山亭)

니산정(泥山亭)



니산정(泥山亭)은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귀미리에 위치한 니산정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의성김씨 귀미 오우당공파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140㎝, 세로 52.2㎝이다. 니산정은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 1825~1912)가 생전에 학문을 익히고 수양하던 곳을 그의 사후에 후손들이 추모하기 위해서 중건한 것으로 원래 위치는 일직면 구천리에 있었는데, 1969년에 이곳으로 이건하였고 2011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니산(泥山)’은 처음 정자가 위치한 구천리의 니구(泥邱)라는 지명에서 취한 말이다. 척암 김도화의 「니산정기(泥山亭記)」에 의하면 니구(泥邱)라는 지명의 유래는 그곳의 토양이 진흙이라서 그렇게 불렀다는 설과 그곳이 야곡(冶谷)으로도 일컬어지고 있기에 ‘흙을 반죽한다’는 뜻에서 취하여 니구라 이름하였다는 설 두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김도화는 「니산정기」에서 니산정의 규모는 모두 3칸으로 가운데의 당(堂)은 『대학』 첫 장의 뜻을 취하여 ‘지지(知止)’라 명명하였고, 좌우에 각각 1칸씩의 실(室)을 두었다. 왼쪽 방을 ‘척암(拓菴)’이라 명명하였는데 이는 스승인 정재(定齊) 류치명(柳致明)이 전척(展拓) 두 글자를 써준 가르침에서 취한 것이고, 오른쪽 방을 ‘관재(觀齋)’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는 『예기(禮記)』의 “서로 관찰하여 착해지도록 인도하는 것을 연마라 한다[相觀而善之謂磨]”라고 한 구절에서 취하였다고 하였다.

글씨는 김종대(金鍾大)가 쓴 해서체이다.

응축된 물방울이 모든 것을 잡아끌다가 또다시 차올라서 무엇엔가 부딪히고 다시 세찬 기운으로 내려와 끈적한 액체 상태를 유지하는 듯 보이는 ‘泥’ 자이다. 우뚝 솟은 절벽을 마주하는 듯한 ‘山’ 자의 기세가 압도적이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의성김씨 귀미 오우당공파(義城金氏 龜尾 五友堂公派) 소개



김도화(金道和, 1825~1912)는 본관이 의성, 자는 달민(達民), 호는 척암(拓庵)이며, 한말 안동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김도화는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귀미리에서 아버지 김약수(金若洙)와 곡구처사(谷口處士) 정상관(鄭象觀)의 딸인 어머니 진양정씨(晉陽鄭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재(定齊) 류치명(柳致明)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을 하니, 류치명은 ‘전척(展拓)’ 두 글자를 써줌에 이로써 ‘척암(拓庵)’으로 자호(自號)하였다. 1893년(고종 30)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김흥락(金興洛), 류지호(柳止鎬) 등과 함께 안동의진(安東義陣) 결성을 결의하고 「안동통문(安東通文)」 작성에 참여하였다. 1896년(고종 33) 1월 20일 안동의진이 구성될 때 여러 지도자들과 협의하여 봉화 유곡(酉谷 닭실) 출신 권세연(權世淵)을 의병장으로 뽑았다. 안동의진의 1차 대장 권세연이 물러나자 김도화는 3월 13일 안동의진의 대장에 추대되었다. 3월 14일 대장에 취임한 후 류난영(柳蘭榮)을 도총(都摠)에, 김흥락과 류도성을 지휘장에 선임하는 등 조직을 정비하였다. 또 의병을 일으킨 뜻을 왕에게 아뢰는 「창의진정소(倡義陳情疏)」를 올리고 각지로 격문을 발송하는 한편 인근 지역에도 의병을 모으는 소모관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1905년(광무 9)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청파오조약소(請罷五條約疏)」, 「포고만국문(布告萬國文)」, 「포고각국공사문(布告各國公司文)」을 작성하였다. 1910년 끝내 일제 강점으로 나라가 망하자 “국가의 통치 권한이 폐하의 사유가 아니고, 한 치의 땅도 한 사람의 백성도 폐하 사물(私物)이 아닙니다. 폐하, 어찌하여 필부들이 자기 논밭을 매매하듯이 해버렸습니까?”라는 내용을 담은 상소문을 올리고 1912년 8월 7일 세상을 떠났다. 평소 위기지학에 힘써 ‘숙흥야매(夙興夜寐) 온고지신(溫故知新)’ 여덟 글자를 벽에 붙여 놓고, 사서(四書)와 『태극도(太極圖)』·『서명(西銘)』·『근사록(近思錄)』·『역번(易繁)』·『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등에 침잠하였다. 문집으로 『척암집(拓庵集)』이 있다.

현재의 니산정(泥山亭)은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자연석 기단을 쌓았는데, 전면과 측면은 50㎝이고 뒷면은 20㎝로 시멘트도 사용하였다. 이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그 위에 각주(角柱)와 원주(圓柱)를 세웠다. 니산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총 6칸 정자인데 우측 온돌방 2칸은 각주이고 마루에는 원주를 세웠다. 4칸의 마루는 우물마루이고, 상부는 5량가로 판대공(板臺工)을 사용하였으며,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마루 전면은 사분합문이고 좌측과 뒷면의 문은 쌍골판문이며 벽은 판벽으로 되어 있다. 온돌방은 마루보다 30㎝ 정도 높으며 쌍띠살문과 띠살문을 달았으며, 벽은 흙벽이다. 마루 좌측 쌍골판문에는 각각 머름중방이 설치되어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홑처마이며, 정면에 ‘니산정’ 편액이 있다.

니산정이 위치한 귀미리는 마을 뒷산이 거북의 꼬리 모양 같다고 해서 귀미(龜尾)라고 하였다. 미천(眉川)이 굽이쳐 흐른다고 하여 구비라고도 하였는데, 발음이 변하여 귀미가 되었다고도 한다. 조선 중기에 오우당(五友堂) 김근(金近, 1579~1656)이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 귀미리 의성김씨 집성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김근의 부친 김안계(金安繼)는 당시 귀미리 일대에서 상당한 재력가로 알려진 이중립(李中立)의 사위였는데, 이를 계기로 김근은 임진왜란이 끝난 1600년경 원래 살고 있던 청송 진보에서 김안계와 모친 월성이씨 그리고 아우인 손암(遜巖) 김원(金遠)과 함께 귀미리로 이주하였다. 김근의 6세손 귀와(龜窩) 김굉(金㙆, 1739~1816)이 크게 학문을 떨쳐 의성김씨 집성촌으로서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였고, 조선 말기 영남의병을 일으킨 척암 김도화도 가문을 크게 빛냈다.

참고문헌
  • 김도화, 『척암문집(拓菴文集)』
  • 한국국학진흥원, 『의성김씨 귀미파문중』, 한국국학진흥원소장 국학자료목록집61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2』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 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