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운정(紫雲亭)
자운정(紫雲亭)은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귀미리에 위치한 자운정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의성김씨 귀미 오우당공파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105㎝, 세로 50.5㎝이다. 자운정은 귀와(龜窩) 김굉(金㙆, 1739~1816)이 1790년(정조 14) 건립하여 강학하던 곳을 그의 사후인 2001년 후손들이 김굉을 추모하기 위해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한 것이다. ‘자운(紫雲)’은 1979년 가을에 김굉의 7대손 김영직(金泳稷)이 자운정을 이건하면서 지은 「자운정이건기(紫雲亭移建記)」에 그 유래를 설명하고 있는데, 김굉이 평소 주희(朱熹)의 학문에 전심하였기 때문에 주희가 자운산에서 강학하던 곳의 지명을 취하여 정자의 이름을 정한 것이라고 한다. 실재 김굉은 경연에서 강론할 때나 고을을 다스릴 때도 모두 주자의 학문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특히 순조의 세자 시절에 김굉이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으로 있으면서 순조에게 『맹자(孟子)』와 『시전(詩傳)』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김굉이 운명하자 순조가 「사제문(賜祭文)」을 내려 김굉의 영혼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자운정은 원래 청산(靑山)의 남쪽에 지었는데 뒤에 팔룡산(八龍山) 남쪽 물가로 옮겼다. 그러다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정자를 지킬 수 없게 되자 1969년 겨울에 니산정(泥山亭)과 함께 이곳으로 이건했다.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의성김씨 귀미 오우당공파(義城金氏 龜尾 五友堂公派) 소개
김굉(金㙆, 1739~1816)의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자야(子野), 호는 귀와(龜窩)이다. 아버지 김광헌(金光憲)과 어머니 영양남씨(英陽南氏) 남이로(南以老)의 딸 사이에서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였는데, 한번은 산사(山寺)에서 공부할 때 온돌방이 매우 뜨거워 발등에 화상을 입었으나, 독서에 열중하느라 알지 못할 정도였다. 1755년(영조 31) 17세의 나이로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에게 입문하여 본격적으로 학문에 정진하였다. 1758년(영조 34) 이상정을 따라 옥련사(玉蓮寺) 강회에 가서 『심경』을 들었다. 1773년(영조 49) 35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고, 1777년(정조 1) 39세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81년(정조 5) 스승 이상정이 죽자 지극한 정성으로 장사를 치르고 이우(李㙖), 이완(李埦) 등과 함께 스승의 유문을 정리하였다. 1787년(정조 11) 승문원정자, 성균관전적을 지냈다. 1788년(정조 12) 귀향해서 강학에 힘쓰며 언론으로써 사림 정치에 참여하였다. 1795년(정조 19) 사헌부지평의 소명을 받았고, 1797년(정조 21) 단양군수에 제수되었다. 그해 겨울에 시무책을 담은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 천하의 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는데, 이 가운데 근본을 다루는 사람은 비록 세상일에 어두운 듯하나 실제로는 쉽게 대처하고, 반대로 말단에 힘을 들이는 사람은 비록 지극히 절실한 듯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공을 이루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 근본을 바로 잡은 뒤라야 말류의 폐단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임을 지적하면서, 여기서 말하는 근본이란 곧 임금의 마음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런 까닭에 임금의 마음이 바르면 천하만사가 다 올바르게 되지만, 바르지 않으면 천하만사가 다 틀어진다는 것이다. 나라를 위한 충정이 깊고 논리가 정연하여 정조가 흔쾌히 받아들였다.대산 이상정의 고제(高弟)로서 스승을 봉향하는 고산서원의 건립을 주선하였고, 영조 등극 초기에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진압할 때 영남 유림이 창의(倡義)한 사실을 입증하는 소를 올렸다. 안동 사림(士林)의 권유로 『영가지(永嘉誌)』를 교정하기도 하는 등 지역 유림의 여론을 대변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평생을 현실 참여적인 자세로 일관하였다. 다양한 직책을 거치면서 군신을 보좌하고 교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목민관을 역임하면서도 백성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부정과 부패를 척결하는 데 힘을 쏟았다. 또 지역 유림의 일에도 솔선수범하며 여론을 향도함으로써 경세(經世)와 학문을 겸비한 실천적 유학자로서의 삶에 충실하였다.김굉은 이상정에게 수학함과 동시에 이상정의 아우인 이광정에게서도 학문적으로 큰 영향을 받았다. 도의로 교제한 학자로는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 1724~1797)과 서신 왕래를 통해 경전(經傳)의 의리를 논변했으며 만년에는 『심경』과 『주자서절요』에 대해서 논의하기도 했다. 입재 정종로와도 학문에 대한 의난(疑難)을 문답하였다. 이외에 이종수, 류장원, 남한조, 이완, 류범휴, 이우 등과도 교유의 폭을 넓혀 학문적 성장을 이룩하였다.문집으로 『귀와집(龜窩集)』이 있는데 원집 14권 7책, 부록 1책, 속집 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집에는 서문과 발문이 없으며 1846년(헌종 12) 문집이 완성되었다. 속집은 1900년(광무 4) 김굉의 현손인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 1825~1912) 등이 원집에서 누락된 자료를 모아 생담정사(笙潭精舍)에서 간행하였다.자운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ㅡ’ 자형 건물로 맞배지붕이다. 평면은 가운데 칸과 오른쪽에는 온돌방을 들이고 좌협칸에는 마루를 배치하였는데 가운데 칸 온돌방 전면에는 마루와 연결되는 툇마루를 설치하고 마루 전면은 개방하여 주위를 조망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구조는 윗면을 시멘트로 마감한 막돌 기단 위에 주초를 놓고 그 위에 각주를 세웠다. 상부구조는 5량가(五梁架)이다.니산정이 위치한 귀미리는 마을 뒷산이 거북의 꼬리 모양 같다고 해서 귀미(龜尾)라고 하였다. 미천(眉川)이 굽이쳐 흐른다고 하여 구비라고도 하였는데, 발음이 변하여 귀미가 되었다고도 한다. 조선 중기에 오우당(五友堂) 김근(金近, 1579~1656)이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 귀미리 의성김씨 집성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김근의 부친 김안계(金安繼)는 당시 귀미리 일대에서 상당한 재력가로 알려진 이중립(李中立)의 사위였는데, 이를 계기로 김근은 임진왜란이 끝난 1600년경 원래 살고 있던 청송 진보에서 김안계와 모친 월성이씨 그리고 아우인 손암(遜巖) 김원(金遠)과 함께 귀미리로 이주하였다. 김근의 6세손 귀와 김굉이 크게 학문을 떨쳐 의성김씨 집성촌으로서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였고, 조선 말기 영남의병을 일으킨 척암 김도화도 가문을 크게 빛냈다. .
참고문헌- 김굉(金㙆), 『귀와문집(龜窩文集)』
- 한국국학진흥원, 『의성김씨 귀미파문중』, 한국국학진흥원소장 국학자료목록집61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2』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 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