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월헌(松月軒)
송월헌(松月軒)은 진일재(眞一齋) 류숭조(柳崇祖, 1452∼1512)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에 건립한 송천서원(松川書院) 내의 편액으로 보인다. ‘송월’은 모든 식물이 시들어 버린 뒤에도 시들지 않는 소나무[松]의 푸른 절개와 기울었다 찼다를 반복하는 한결같은 달[月]의 의미를 취한 것이다. 무릇 사계절을 통틀어 영원히 푸른 것이 소나무며, 억만년을 지나도 항상 밝은 것이 달이다. 때로 뒤늦게 시드는 경우가 있어도 영원히 푸르름이 변치 않고, 때로 가득 찼다가 기우는 경우가 있어도 항상 밝음이 바뀌지 않는다. 영원히 푸르면서 변하지 않는 것이 절조(節操)에 가까우므로 군자들이 이것을 본받아 스스로 그 절조에 힘쓰며, 항상 밝아 바뀌지 않는 것이 덕에 비견되므로 군자들이 스스로 그 덕을 밝힌다. 이는 바로 류숭조의 강직하고 올바른 절의정신과 선비정신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편액의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전주류씨 진일재종택(全州柳氏 眞一齋宗宅) 소개
류숭조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종효(宗孝), 호는 진일재(眞一齋)이다. 영흥대도호부사 류빈(柳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류경손(柳敬孫)이다. 아버지는 서령 류지성(柳之盛)이며 어머니는 권득(權得)의 딸이다. 1472년(성종 3)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으며, 1489년(성종20)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교서관정자에 발탁되고 사유록에 들었다. 그 뒤 사간원정언, 홍문관부교리, 사헌부장령 등을 지내면서 정부 관원들의 기강 확립과 국왕에 대한 간쟁에 힘썼다. 1504년(연산군 10) 국왕의 어지러운 정치를 직간하다가 미움을 사서 원주로 유배되었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복직되고 이와 함께 네 자급(資級)을 뛰어 판결사에 등용되었고 공조참의로 옮겨져 삼공(三公)들의 주청으로 경연관을 겸임하였다. 이어 성균관 대서성,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성리학의 학통을 새롭게 젊은 문신들에게 전수하였다.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장(師長)의 자리를 류숭조가 아니면 지킬 사람이 없다는 삼공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재임되었다. 18년 동안의 벼슬길을 거의 성균관에서 보내면서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 유림을 다수 배출시켰으며 성리학의 학풍을 크게 북돋우었다. 『서경』·『역경』·『예기』에 밝았고, 특히 천문·역상에 통달해 자신이 손수 혼천의를 만들기도 하였다. 특히 류숭조가 남긴 『칠서언해』는 언해의 효시로 후학들에게 큰 공적을 남겼다. 또한 벼슬길에서 보인 강직함과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언간의 올바른 정신은 후학들에게도 모범이 되었다. 벼슬은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진일재문집』 4권, 『대학잠大學箴』 1권이 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류숭조는 생전에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시 1수와 소(疏) 1편만 남은 채 거의 다 유실되었다. 다만 중종의 특명에 의해 간행된 『대학잠大學箴』과 『성리연원촬요性理淵源撮要』만이 세상에 전한다. 이 책은 후손들이 류숭조와 관련된 자료를 여러 문적(文蹟)에서 수집해 제1책에 싣고, 다시 『대학잠』과 『성리연원촬요』는 제2책에 수록해 2책으로 간행한 것이다. 특히 『대학잠』은 「명명덕明明德」·「작신민作新民」·「지지선止至善」·「사무송使無訟」·「격물치지格物致知」·「근독謹獨」·「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치국齊家治國」·「혈구絜矩」 등의 10잠(箴)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 격언지론으로서 원래는 제왕(帝王)의 치도(治道)를 위해 쓰인 것이지만 경학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특히 「명명덕잠」 가운데 ‘이동기협, 사단지정, 기동이수, 칠정지맹(理動氣挾, 四端之情, 氣動理隨, 七情之萌)’이라는 이동기동(理動氣動)의 논리는 이황(李滉)의 이발기발(理發氣發)의 논리와 맥을 같이하는 대목으로 주목되는 발언이다. 『성리연원촬요』는 서명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주역』에서부터 송대의 제유(諸儒)에 이르기까지 성리학의 연원이 되는 주요 내용들을 발췌·편찬한 것이다.송월헌 편액이 걸려 있던 송천서원은 1823년(순조23)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류숭조(柳崇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는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 (고종 8)에 훼철되어 복원하지 못했으나 8칸의 강당을 송천서당(松川書堂)으로 개조하여 사용하다가 최근에 송록서원(松簏書院)이라는 이름으로 합쳐 복원되었다. 송록서원 복설 경위를 살펴보면 2004년에 2월에 봉화군내 뜻있는 인사 백여 명이 회동하여 군내에 소재한 서원 중 당회(堂會)만이라도 유지하고 국가사회에 공헌한 업적이 지대하여 명망이 높은 분을 모셨으며 기본 재산이 있어 서원복설부지활용과 유지관리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서원으로 진일재(眞逸齋) 류숭조(柳崇祖)를 봉안한 송천서원(松川書院)과 구전(苟全) 김중청(金中淸)을 봉안한 반천서원(盤泉書院), 그리고 용재(慵齋) 이종준(李宗準)‧눌재(訥齋) 이홍준(李弘準)‧문봉(文峯) 정유일(鄭惟一)‧매헌(梅軒) 홍준형(洪浚亨)‧팔오헌(八吾軒) 김성구(金聲久)‧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을 봉안한 백록리사(栢麓里社) 등 세 개의 서원을 ‘송록서원’으로 통합하여 복설하고 출생연대를 기준으로 류숭조를 주벽으로 하고 나머지 9위(位)의 신위(神位)를 동반(東班)에 사위(四位), 서반(西班)에 오위(五位)를 봉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