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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헌(吾軒)

반남박씨 무섬 오헌고택(潘南朴氏 吾軒古宅)

56.5x131.0x7.1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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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오헌(吾軒)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56.5x131.0x7.1
  • 건물명 오헌(吾軒)
  • 공간명 반남박씨 무섬 오헌고택(潘南朴氏 吾軒古宅)
  • 서예가
  • 위치정보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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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헌(吾軒)

오헌(吾軒)


오헌(吾軒)은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에 있는 반남박씨(潘南朴氏) 오헌(吾軒) 박제연(朴齊淵, 1807~1890) 고택의 당호 편액이다. ‘오헌’은 도연명의 「독산해경讀山海經」의 “초여름에 풀과 나무 무성하게 자라나서, 집을 에워싸고 나뭇가지 우거졌네. 뭇 새들도 깃들 곳이 있어 즐겁듯이 나 또한 내 오두막집을 사랑노라. [孟夏草木長 繞屋樹扶疎 衆鳥欣有托 吾亦愛吾廬]”라는 구절에서 인용하였으며 세속의 부귀영화에 연연하지 않고 사물과 내가 하나가 되어 즐겁게 살아간다는 뜻이다. 또한 박제현은 ‘나[吾]’에 대한 ‘자명(自銘)’을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나로서 나를 보면
나는 나를 알지 못한다
내 밭을 갈거나 혹은 책을 읽어서
분수에 만족함이 나이다
나를 굳세게, 혹은 부드럽게 해서
내 몸을 바로잡음이 나이다
나를 충실하게, 혹은 미덥게 해서
남을 대함이 나이다
나를 나아가게, 혹은 물러나게 해서
처세함이 나이다.
나를 안으로, 혹은 밖으로 하면
나는 내가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以吾觀吾
吾不知吾
耕吾讀吾
安分是吾
剛吾柔吾
律身是吾
忠吾信吾
接物是吾
進吾退吾
處世是吾
內吾外吾
吾不愧吾

편액의 글씨는 1875년(고종 12) 당대 최고의 개화사상가인 환재(瓛齋) 박규수(朴珪壽, 1807~1877)가 썼다. 특히 ‘오헌’이라고 명명한 의미를 편액의 여백에 작은 초서로 써서 그 조형성을 더해 주고 있다.

“뭇 새들도 깃들 곳 있어 즐겁듯이, 나 또한 내 오두막집을 사랑하노라고 했는데, 이는 도연명(陶淵明)이 마음으로 사물과 내가 즐거움을 함께 누리기를 기대한 것이니, 완전히 천진스러운 말이다. 무릇 자신을 아는 자가 드문데 자신을 온전히 하는 자는 더욱 드물다. 내가 사랑하는 바가 있은 뒤에야 내가 좋아하는 일에 종사할 수 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자가 우리 반남박씨 종친 중에 해당하는 사람이 있다. 을해(1875) 8월 백송당(白松堂)에서 박규수가 쓰다.”

‘뭇 새들도 깃들 곳 있어 즐겁듯이, 나 또한 내 오두막집을 사랑하노라’(衆鳥欣有托 吾亦愛吾廬). 도연명의 ‘독산해경讀山海經’ 구절 ‘애오헌愛吾廬’을 언급하며 ’오헌吾軒‘의 내력을 편액에 작은 글씨로 새긴 점이 특이하다. 吾에서 가운데 가로획을 힘차게 그었다. 그 조짐은 이미 그 이전 첫 획의 짧은 가로획에서 보인다. 軒에서 마지막 세로획을 강조한 것은 吾의 가로획을 의식한 자연스런 현상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균형 있는 기세로 대응하여 안정적이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반남박씨 무섬 오헌고택(潘南朴氏 吾軒古宅) 소개


반남박씨(潘南朴氏) 오헌고택은 고려 반남현 호장을 지낸 박응주(朴應珠)의 후손이다. 5세 박상충(朴尙衷, 1332~1375)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하생으로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과 판전교시사 등을 역임하였다. 문정공의 시호를 받았고 반남선생이라 불렸다. 박상충의 아들 박은(朴訔, 1370~1422)은 조선개국 후 이방원의 난에 공을 세워 익대동덕좌명공신 3등으로 반남군에 봉해졌다가 금천부원군으로 다시 봉해졌고 이후 태종 때 우의정과 좌의정에 올랐다. 박상충과 아들 박은이 정계에서 두각을 드러내면서 반남박씨는 조선 전기에 명문가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박은의 증손 박숙(朴䃞, 1444~1526)은 능성구씨(綾城具氏) 안동 입향조 구익명(具益命)의 사위가 되어 서울에서 안동으로 이거하면서 처가가 있는 모사골 남쪽인 나주골에 정착하였다. 박숙의 장남 박침(朴琛, 1465~1549)과 셋째 박형(朴珩)은 16세기 초에 안동에서 영주로 이거하면서 영주 문수면 월호리와 영주 두서에 정착하였다. 이후 여러 대를 내려가서 17세기 중반 박수(朴檖) 대에 이르러 반남박씨가 영주 무섬[水島]마을에 비로소 입향하였다. 박수는 1666년(현종 7) 강 건너 서쪽에 있는 원암(머름)에서 무섬으로 옮겨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가 바로 박제연의 6대 조이다.

박제연의 자는 성원(聖源), 호는 오헌(吾軒),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부친은 재순(在純), 모친은 안동권씨(安東權氏) 권사선(權師善)의 딸이다. 1807년(순조 7) 12월 6일에 태어났으며 일찍이 일포(逸圃) 박시원(朴時源, 1764~1842)에게 경학(經學)을 수학하였다. 이후 1840년(헌종 6) 34세에 문과에 급제한 뒤 전적, 장악원정, 병조참지,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박제연은 풍채가 훤칠하고 도량이 넓고 깊었다. 그 마음은 충후하고 인자했으며 그 말은 꾸밈없고 진실하며 화려하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로 집안에 있을 때는 품행을 닦았고 관직에 있을 때는 자신의 직분에서 걱정해야 할 것만을 생각하였다. 평소 중도를 넘어서는 행동과 분수에 맞지 않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마음이 편안하여 남에게 말하지 못할 일이 없었다. 남에게 원근과 친소를 구분하지 않고 오로지 어진 마음으로 대했으며 마음의 벽을 만들지 않았다. 때때로 벗을 불러 아름다운 산수에서 휘파람을 불며 마음껏 노닐었는데, 빛나는 풍채는 바라보면 마치 신선과 같았다. 농부와 들밥을 해가는 아낙네일지라도 동류처럼 사랑하며 기쁘게 대하였다. 1890년(고종 27) 윤 2월 22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84세였다.

영주 무섬마을은 태백산의 한 줄기인 안동 학가산의 끝자락에 위치한 마을로 안동 하회마을, 예천 회룡포 등과 함께 물이 마을을 감싸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물돌이 마을이다. ‘무섬’은 물 위에 떠 있는 섬을 뜻하는 한글 이름이며 한자로는 수도(水島)로 표기한다. 무섬마을은 뒤로는 태백산 줄기가 감싸고 있으며 낙동강의 건너에는 소백산 줄기가 뻗어져 있다. 태백산에서 이어지는 내성천과 소백산에서 흐르는 서천이 합류하여 동남쪽 일부만이 좁게 육지로 이어지며 아름다운 물줄기는 마을의 삼면을 휘돌아 흐른다. 이러한 모습은 섬계(剡溪 절강성에 있는 조아강)의 상류와 비슷하다 하여 섬계마을로도 불린다. 400여 년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무섬마을은 반남박씨와 선성김씨(宣城金氏) 두 집안이 집성촌을 형성하여 현재까지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무섬마을에는 입향조인 박수가 지은 만죽재고택, 오헌고택, 해우당(海愚堂) 김낙풍(金樂豊)이 세운 해우당고택 등 많은 전통 가옥들이 있다. 2013년에 마을 전체가 국가 중요민속문화재 제278호로 지정되었다.

오헌고택은 박제연과 그 후손들이 대대로 살았던 집으로, 1934년 중수되었고 2004년 보수하였다. 건물은 사랑채 좌측에 날개를 단 정면 6칸, 측면 5칸의 ㅁ자형 평면이다. 평면 구성은 전면 중문 우측에 작은 사랑방 1칸을 두고 좌측은 사랑채 부분으로 사랑방 2칸, 마루방 1칸, 온돌방 1칸이 놓여 있다.

참고문헌
  • 朴珪壽, 「吾軒記」
  • 許傳, 「吾軒記」, 『性齋集』 권14.
  • 李晩燾, 「嘉善大夫行兵曹參判兼同知春秋館義禁府事朴公墓碣銘」, 『響山集』 권14.
  • 『편액』, 한국국학진흥원, 2013.
  • 우진웅, 「반남박씨 오헌고택」, 『한국국학진흥원소장 국학자료목록집』 38, 한국국학진흥원,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