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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당(忠孝堂)1

순천김씨 충효당(順天金氏 忠孝堂)

58.0x117.5x5.2 / 전서(篆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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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충효당(忠孝堂)1
  • 글자체 전서(篆書)
  • 크기 58.0x117.5x5.2
  • 건물명 충효당(忠孝堂)
  • 공간명 순천김씨 충효당(順天金氏 忠孝堂)
  • 서예가
  • 위치정보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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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당(忠孝堂)1

충효당(忠孝堂)1


충효당(忠孝堂)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구담리에 있는 순천김씨(順天金氏) 충효당에 게시되어 있던 편액이다. 충효당은 충성과 효심이 있는 사람의 집이란 뜻으로, 바로 김협(金協)의 충심과 효심을 기리기 위해 지었다. 김협의 모친이 겨울에 잉어를 먹고 싶다고 하자 김협이 잉어를 잡을 길이 없어 물가에서 고민하던 중 김협의 효심에 감복하여 물에서 잉어가 뛰어 올라왔다고 하는 민담이 전해진다. 또 김협은 임진왜란 때 대전(大箭)을 주조해 적을 제압하는 데 공을 세워 나라를 위해 충성한 면모도 함께 추앙받고 있다. 충효당은 순천 김씨 충효당파의 종택이기도 하다. 이 현판은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 1835∼1919)이 70세 때인 1904년에 행서로 쓴 것이다.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필획, 필획 사이의 깨끗함뿐만 아니라 행간에 흐르는 맑은 기운이 서늘하게 한다. 평생을 닦은 수행이 형상으로 드러난 듯 숙연해진다. 앞 두 글자에서 평담을 유지하는데 성공한 후 堂에서 보여 준 흥취는 하나의 반전이다. 평담한 가운데 살짝 드러난 파격의 해학이다. 노년의 천진함이다. ‘73세 늙은 사람 해사(海士)’라고 썼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순천김씨 충효당(順天金氏 忠孝堂) 소개


충효당이 있는 구담리는 안동의 서쪽 끝에 위치한 마을로, 동쪽으로 풍천면 도양리, 남쪽으로 풍천면 기산리, 서쪽으로 예천군 지보면, 북쪽으로 예천군 호명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영가지永嘉誌』에서는 “인물이 부성하고 아름다운 집이 쌓여 비친다. 매번 아름다운 날이면 영절가(令節歌)가 사방에서 일어난다. 사람들은 ‘작은 서울[小京華]’이라고 일컬었다.”라고 하였다. 이곳은 원래 풍산현에 속했으나 1895년 지방관제 개정에 의해 안동군 풍산면에 편입되었다. 그 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 예천군 용궁면 신상면 암천리의 일부와 예천군 호명면 금릉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구담동이라 했으며 1934년 행정구역 변경이 있을 때는 안동군 풍천면에 편입되었고, 1995년에 안동군이 안동시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명을 구담(九潭)이라고 한 것은 이 지역에 낙동강의 흐름에 의해 생긴 아홉 개의 깊은 소(沼)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이 마을에는 가난하여 끼니를 거르는 일이 많았지만 한 번도 남의 것을 탐낸 적이 없는 마음씨 착한 노인이 장성한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이들 부자는 농사지을 땅이 없어 남의 집 머슴으로 삶을 지탱해 갔다. 어느 해 심한 가뭄이 닥쳐 그 해 농사는 이미 수확할 곡물이 없어 망치게 되자 모든 마을 사람들이 가뭄이 들어도 논에 물을 댈 수 있는 우물을 파기로 결정했다. 모든 사람들이 이곳을 파면 물이 나올 것이라는 장소 일곱 곳을 정하여 파내려 갔지만 어느 곳에서도 물은 솟지 않고 오히려 웅덩이를 파다가 그만 착한 아들이 흙더미에 깔려 압사하는 큰 사고가 났다. 이에 마을사람들은 실망하여 일손을 놓았다. 그러나 노인은 홀로 여덟 번째 웅덩이를 파내려 갔으나 이곳 또한 물이 나지는 않았다. 노인은 기진맥진하여 집으로 돌아와 쓰러져 자는데 홀연히 백발노인이 나타나 “뒷산 고목나무 옆에서 100보 떨어진 곳에 웅덩이를 파보아라.”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꿈에서 깬 노인은 너무나 생생하여 노인이 가리켜준 곳을 파니 놀랍게도 굵은 물줄기가 솟아 못을 이루고 가뭄을 면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지금도 이 못이 남아 있으며 못이 아홉 개나 있다고 하여 구담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안동댐과 임하댐의 건설로 예전의 소는 찾을 수 없고, 자연습지가 만들어져서 생태계의 보고로 많은 관심을 일으키고 있다.
구담리는 순천김씨와 광산김씨(光山金氏)들이 집성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는 곳이다. 순천김씨는 구담 2리 안골을 중심으로, 마을의 동쪽 입구에 해당하는 두동, 두동 서쪽에 형성된 뒤주골, 뒤주골 서쪽에 형성된 동산말량, 안골 서쪽에 위치하는 유릅말량 등지로 넓게 분포되어 살고 있다.
순천김씨가 구담에 세거한 것은 국담(菊潭) 김유온(金有溫)부터 시작했다. 김유온은 김승주(金承霔)의 아들로 공조정랑, 예조참의, 첨지중추원사 등을 역임했다. 김유온은 상주목사 권집경(權執經)의 사위로 계유정난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452년 시국이 불안하다는 것을 느끼고 처향인 구담마을로 낙향해 일가를 이루었다. 김유온의 아들은 김원석(金元石)과 김형석(金亨石)이고, 김원석의 아들은 김약균(金若均)과 김약형(金若衡)이다. 현재 구담에 살고 있는 후손들은 김약현의 후손들이다. 김협은 자는 길보(吉甫)이고 호는 충효당(忠孝堂)이다. 김약형의 증손이고 감찰(監察) 김자원(金自願)의 아들로 류성룡(柳成龍)에게서 수학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체부(體府)에 발탁되어 병기(兵器)를 연구하여 화전(火箭)을 개발하였다. 의학에도 뛰어나 선조의 시의(侍醫)를 지냈다. 만년에는 혜민서 주부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충효당은 풍천초등학교 정문 길 건너에 있는 건물이다. 도로에서 시멘트로 만들어진 계단을 올라가면 사주문이 있고 주변이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안에 동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이다. 좌측 뒤편에 1칸의 온돌방을 배치하고 나머지는 모두 마루로 꾸몄다. 우측면과 후면은 판벽을 세우고 판문을 달았다. 시멘트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는데, 전면 가운데 3개는 두리기둥이고 나머지는 각주를 사용하였으며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참고문헌
  • 안동대학교 대학원 민속학과 BK21 사업팀, 『오일장과 함께 가는 구담마을』, 민속원, 2010.
  • 디지털안동문화대전(http://andong.grandculture.net/)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목판아카이브(http://mokpan.ugyo.net/hyunpan/)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