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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헌(啞軒)

풍산김씨 학사종택(豐山金氏 鶴沙宗宅)

35.5x41.5x7.8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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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아헌(啞軒)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35.5x41.5x7.8
  • 건물명 아헌(啞軒)
  • 공간명 진주강씨 국전공파(晉州姜氏 菊田公派)
  • 서예가
  • 위치정보 안동시 북후면 옹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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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헌(啞軒)

아헌(啞軒)


아헌(啞軒)은 경상북도 봉화군 물아면 봉화군 오록마을에 있는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1587~1667) 종택에서 소장하던 서실 편액으로 ‘말을 아낀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또 김응조의 별호이기도 한데, 『학사집 연보』에 의하면 김응조는 48세 때인 1634년 관직을 버리고 영주의 갈산으로 돌아와 남쪽 벼랑 바위 위에 3칸의 집을 지었는데 방 2칸은 명재(瞑齋)라 하고 판방 1칸은 아헌이라 명명하고서 합하여 남애정사(南厓精舍)라 편액하였다. 김응조가 지은 「명재기瞑齋記」에 아헌이라 명명한 이유가 어렴풋이 담겨져 있어 소개하기로 한다. “아수(啞叟)는 부여받은 품성이 본래 약하여 평생 적게 일어나고 많이 누워 지내며 적게 걷고 많이 앉아 있다. 아이 겨우 50세에 눈도 어둡고 머리털이 새하얗고 정신도 피로하다. 간혹 아침밥도 소화를 못시킬 때도 있고 글을 봐도 오래 가지 못하고 생각이 잠시라도 곤하면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펴며 잠을 잘 생각을 한다. 이런 때에 시력이 보이지 않고 청력이 밝지 못하며 음식을 먹어도 제 맛을 모르며 정신이 혼미하고 생각이 어지러워 수습할 수가 없게 되면 곧장 작은 집 창 아래에서 앉아 존다. 잠시 뒤에 나풀나풀 나비와 함께 가서 온갖 일을 남겨 두고 온갖 걱정을 잊어버린다. 또한 선한 생각·악한 생각 모두 사라지고 슬픈 마음·기쁜 마음을 갑자기 풀어버린다. 그리하여 만물과 변화여 어두워지면 태평하고 화락하게 일찍이 내가 사물인지 사물이 나인지,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무엇이 영화롭고 무엇이 욕된지를 모른다. 또한 내가 처한 세상이 옛날인지 지금인지, 잘 다스려지는지 혼란스러운지, 당우(唐虞) 삼대(三代)인지 한당(漢唐) 오계(五季)인지를 모른다. 들은 것이 없으면 이에 보는 것이 있고 이미 좋아하는 것이 없으면 이에 싫어하는 것이 있다. 배고픈지 배부른지를 모르고 추운지 더운지도 모른다. 비난과 칭찬이 미치지 않고 출척(黜陟)이 더해지지 않아 퇴연히 어둠속의 사람이 되어 새가 지저귀어도 깨닫지 못하고 손님이 찾아와도 알지를 못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깨어나면 정신이 맑고 기운이 밝아 하늘은 더욱 높게 되고 땅은 더욱 넓게 되어 어렴풋이 새벽달이 처음 떠올라 저녁이 되어 절로 사라지는 것처럼 한때 자득한 즐거움은 스스로 만종(萬鍾)을 가벼이 여기고 천사(千駟)를 업신여길 수 있다. 마침내 그 집을 명재(瞑齋)라 이름 짓는다.”라고 하였다. 편액의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작은 편액에 더 작은 두 글자가 소박하고 단정하다. 啞 는 ‘벙어리 아’ 즉, ‘말을 하지 않음’을 뜻한다. 亞가 아니라 啞이다. 편액에 남은 공간이 글자보다 몇 배는 더 크다. 침묵의 공간인가? 큰 공간이 비어있지 않고 가득 차 보이는 것은 그런 이유가 있는 까닭이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진주강씨 국전공파(晉州姜氏 菊田公派) 소개


김응조(金應祖, 1587∼1667)의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효징(孝徵), 호는 학사(鶴沙) 또는 아헌(啞軒)이다. 산음현감을 지낸 김대현(金大賢)의 여섯째 아들이다. 17세 때 류성룡(柳成龍)을 사사하였으며, 1613년(광해군 5)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당시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보고 문과응시를 포기하고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학문연마에 힘썼다. 1623년 인조가 즉위하자 알성문과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하여 병조정랑·흥덕현감·선산부사 등을 역임하고, 사헌부지평·공조참의·한성우윤 등의 여러 관직을 인조·효종·현종 삼대에 걸쳐 역임하였다. 1637년(인조 15)에 청나라 사신이 빈번히 출입하자 접대비 염출을 위해 삼분모회록법을 제안하여 시행했다가 필요 없게 되자 1658년(효종 9) 폐지하게 하였다. 1638년(인조 16)에 사헌부장령으로 있으면서 8조를 건의했는데, 그중 하나가 명대의(明大義)로 사대교린의 외교 정책을 지지하고 절의를 고집하면서 교린을 가볍게 단절함을 비판하였다. 1651년(효종 2)에 『대학연의大學衍義』의 강(講)을 마치고 근래에 문교(文敎)가 전폐됨을 개탄하면서 학문 권장을 건의하였다. 1656년(효종 7)에 예조참의로 있으면서 “마음을 닦아 본성을 기를 것,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들을 사랑할 것, 문(文)을 숭상해 학문을 일으킬 것”을 건의하였고 1659년(효종 10)에 공조참의로 있으면서 임금으로서 행할 도리를 상소하였다. 1664년(현종 5)에 금성산성의 군량미 문제로 예조판서 홍중보(洪重普)와 병조판서 김좌명(金佐明)으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현종은 삼조(三朝)를 시종한 신하이자 나이가 80세이며 집이 멀리 영남에 있는 점을 고려해 사면하였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남애정사 건립을 축하하면 지은 시가 있어 소개하기로 한다. 일찍이 학록(鶴麓)에 머물러 살 계획을 하였기 때문에 이른 것이다.

말 듣건대 남애에다 작은 집을 지었는데
흰 구름이 울타리고 푸른 솔이 문이라네
어느 때에 산을 나눌 약속이 잘 성사되어
막대 짚고 두건 쓰고 둘이 서로 오고 가나

聞道南厓小築完
白雲籬落碧松關
何時得遂分山約
藜杖緇巾共往還

오미동의 풍산김씨(豊山金氏)는 고려 중기 인물인 김문적(金文迪)을 시조로 하고 있으며, 안동에서 지주적 기반을 형성하게 된 배경은 김안정(金安鼎)의 둘째 아들인 김자순(金子純)이 안동 풍산 오릉동(지금의 오미동)에 살기를 정한 데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자순의 후손들은 이후에도 사환으로 서울에 거주하였는데, 허백당 김양진이 오릉동을 자주 출입하였다가 그의 아들 잠암 김의정이 을사사화 이후 안동으로 완전히 낙향하여 오릉동을 오무동으로 바꾸어 정착함으로 인해 명망세족으로 성장하는 기초를 닦았다. 그런데 정치적 환멸을 느낀 그는 아들에겐 벼슬하지 말고 농사나 지으면서 살라는 의미로 이름조차 ‘농(農)’으로 바꾸었다. 손자인 유연당(悠然堂) 김대현(金大賢)은 도연명(陶淵明)의 「음주飮酒」 시의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캐노니 저 멀리 아득히 남산이 보이네.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에서 취하여 이웃 마을에 사는 김윤안(金允安)과 서로 호를 나누어서 김윤안은 동리(東籬)라 하고 김대현은 유연당이라 자호하기도 하였다.

김대현은 아홉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이 중에 여덟째 김술조(金述祖)는 요절하였고 나머지 여덟 명은 학호(鶴湖) 김봉조(金奉祖, 1572~1630)·망와(忘窩) 김영조(金榮祖, 1577∼1648)·장암(藏庵) 김창조(金昌祖, 1581~1637)·심곡(深谷) 김경조(金慶祖, 1583~1645)·광록(廣麓) 김연조(金延祖, 1585~1613)·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1587~1667)·학음(鶴陰) 김염조(金念祖, 1589~1652)·설송(雪松) 김숭조(金崇祖, 1598~1632)이다. 특이하게도 8형제 모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이들 중 5형제(봉조·영조·연조·응조·숭조)는 문과에 급제하자 인조 임금이 팔련오계지미(八蓮五桂之美)라 칭찬하고 마을 이름을 오무동에서 오미동으로 고치게 하고 마을 앞에 봉황려라는 문을 세우게 하였다. 이때부터 오미동의 풍산김씨는 미김(美金)으로 불리며 명망 있는 재지사족으로의 기반을 확고히 다지게 되었다. 8형제는 모두 현달하여 학호파·망와파·장암파·심곡파·광록파·학사파·학음파·설송파 등으로 분파되어 각기 파조를 이루었다. 8형제 가운데 김봉조·김경조·김숭조는 그대로 오미리에 세거하였고, 김영조·김창조·김응조는 영주에 살다가 그 후손들 중 제주목사를 지낸 노봉(蘆峯) 김정(金伯政, 1670∼1737)이 1696년(숙종22) 오전리에 살고 있던 삼종형(三從兄) 김성(金伯星, 1661~1724)에게 인사차 들렀다가 풍수가 너무 좋아서 오록에 터를 잡아 후손들이 세거하였다. 김연조의 후손들은 예천 벌방리에 터전을 잡았으며 김염조는 재종숙 둔곡(遁谷) 김수현(金壽賢, 1565∼1653)에게 출계(出系)하여 경기도 파주로 이거하였다.

참고문헌
  • 金應祖, 「瞑齋記」, 『鶴沙先生文集』 권5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안동)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 Ⅱ, 2015.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 『민심을 보듬고 나라를 생각하며』, 제10회 기탁문중 특별전(풍산김씨 허백당 문중), 2013.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