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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당(視聽堂)

성주 법산 영천최씨 시청당(星州 法山 永川崔氏 視聽堂)

35.0x94.0x3.3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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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시청당(視聽堂)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35.0x94.0x3.3
  • 건물명 시청당(視聽堂)
  • 공간명 횡성조씨 월천종택(橫城趙氏 月川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안동시 월천서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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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당(視聽堂)

시청당(視聽堂)


시청당(視聽堂)은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 법산마을에 있는 시청당(視聽堂) 최성욱(崔性郁, 1896~1980)의 당호 편액이다. ‘시청’은 부모님이 말씀하시기 전에 그 의도를 먼저 헤아려 그 뜻을 받든다는 의미이다. 『예기』, 「곡례 상曲禮 上」 27장에 “소리 없는 것에서 듣고 드러나지 않는 것에서 본다. [聽於無聲 視於無形]”라고 한데서 취하였다. 그리고 「곡례 상」 27장의 ‘소(疏)’에 “비록 듣는다고 했으나 실제로 부모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아니며, 비록 본다고 했으나 부모의 형체를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늘 마음속에서 모습을 보고 소리를 들은 것같이 생각하여 마치 부모가 나에게 지시해서 그렇게 한 것처럼 한다는 말이다. [雖聽而不聞父母之聲 雖視而不見父母之形 然常於心 想像似見形聞聲 謂父母 將有敎使己然]”라고 하였다.

굳센 필치 날카로운 예각, 극단적인 대비 등 일도양단의 결단이 필요한 무사를 모습인 듯 검기가 서린다. 들어가는 필획에 뾰족함이 드러나고 가로 세로 연결부분에도 과장된 듯 억센 모습이다. 강함이 지나치면 불편하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횡성조씨 월천종택(橫城趙氏 月川宗宅) 소개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 법산마을은 남쪽을 가로 흐르는 대가천 건너로 성주군과 고령군을 잇는 33번 국도가 있고, 오암서원 앞 제방이 성주와 고령을 경계하고 있다. 동쪽 멀리 이봉산이 있고 마을 앞 별뫼산은 호랑이가 파수 보듯 엎드려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국립공원 가야산이 병풍을 쳐놓은 듯이 우람한데 남쪽 자라산은 덕은산성에서 완만히 내려와 기암절경에 오암서원이 우뚝 서 있고, 북에서 감토봉이 내려 뻗은 끝자락인 진수봉이 학처럼 나래를 펴 홀로 법산마을을 아늑하게 감싸고 있다. 또 수도산과 가야산이 함께 발원해 넉넉하게 내려준 젖줄 대가천 물은 무흘구곡을 흘러 지나면서 오암 끝자락을 굽이치며 흘러내려 마을 앞 넓은 들녘을 일궈 뒤뜰 언덕에 옛날 남창을 세울 만큼 아늑하고 풍요롭다. 생활 터전으로써 풍광이 뛰어난 산자수명, 배산임수의 조건을 고루 갖춘 복된 고장이다.

법산마을은 영천최씨(永川崔氏) 문중의 집성촌이다. 영천최씨 시조 최한(崔漢)은 경주최씨에서 분적한 최균(崔均)의 9세손 최식(崔寔)의 둘째 아들이다. 최한은 고려 때 예종과 명종 양대에 걸쳐 벼슬을 하면서 공을 세워 연산(영천의 별호) 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관향을 영천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영천최씨는 시조 최한 이래 명현거공이 대대로 배출되어 명문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영천최씨가 성주군에 정착한 것은 입향조인 죽헌(竹軒) 최항경(崔恒慶, 1560~1638) 때이다. 그는 16세 때인 1575년(선조 8)에 부친 진사 최정(崔淨)이 성묘차 성주 법산에 왔다가 병을 얻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도움을 받아 3년 시묘를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때 모친이 최항경에게 “벼슬을 원하지 않으면 굳이 서울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도학이 높은 한강 선생을 스승으로 삼는 것이 어떠냐?”고 권유해 선영에서 가까운 법산에 자리를 잡았다.

최항경의 자는 덕구(德久), 호는 죽헌(竹軒), 본관은 영천(永川)이며, 부친은 성균진사 최정(崔淨)이다. 그는 한강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는데 매진하였고 1605년(선조 38) 증광시 생원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었다. 그래서 거처하는 부근에 오암정사를 짓고 위기지학(爲己之學)과 궁행실천(躬行實踐)에 힘썼으며 이때 스스로를 경계하는 「자경잠自警箴」을 지었다.

“마음을 붙잡아 잠시라도 놓아버리지 마라. 이 마음을 어떻게 붙잡을 것인가. 깊이 탐구하여 투철하게 분석해야 한다. 이치에 의존하고 욕심을 막으며 옳은 방법에 따라 공경하고 바르게 행해야 한다. 성의(誠意)·정심(正心)·격물(格物)·치지(致知)를 이루는 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쉬지 않고 힘쓰는 것이다.”

이후 한강이 예서를 저술할 때 최항경 삼부자는 스승의 저술 작업에 동참하였다. 한강이 사망하자 두 아들과 함께 친히 염빈을 하는 등 마치 부모상을 당한 것 같이 하였다. 한강의 문집을 간행하는데 앞장서서 교감하였고, 회연서원에 봉향하는데도 적극 나섰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늙은 어머니를 모시느라 직접 싸움터엔 나가진 못했지만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초유격문(招諭檄文)에 감동하여 지은 시가 있다. 병자호란 때는 두 아들을 고령 창의진에 내보냈으나, 왕이 이미 항복했다는 소식에 격분하는 원한시를 지었다. 1678년(숙종 4)에 통훈대부 제용감정에 증직되었고, 1735년(영조 11)에 두 아들 최은(崔𨏈), 최인(崔轔)과 함께 오암서원에 봉향되었다.

성주 법산 영천최씨 시청당 집안은 입향조 죽헌 최항경의 후손이다. 시청당(視聽堂) 최성욱(崔性郁, 1896~1980)은 옥산서원과 도산서원 원장을 지냈고, 오암서원을 재창건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부친 여와(餘窩) 최우동(崔禹東)은 궁내부주사와 승훈랑을 지냈다.

참고문헌
  • 수륜면 법산 마을을 재조명하다(1), 성주신문, 2017년 8월 16일 기사.
  • 김봉규, 죽헌(竹軒) 최항경(1560~1638), 不遷位 기행 27, 영남일보, 2011년 6월 29일 기사.
  • 죽헌 최항경,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