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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산(洗山)

전주류씨 존재종택(全州柳氏 存齋宗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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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세산(洗山)
  • 글자체 예서(隸書)
  • 크기 30.0x70.1x2
  • 건물명 세산(洗山)
  • 공간명 전주류씨 존재종택(全州柳氏 存齋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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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산(洗山)

세산(洗山)


세산(洗山)은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전주류씨(全州柳氏) 정재(定齋)종택의 부속 건물에 걸려 있던 편액으로, 류치명(柳致明, 1777~1861)의 아들인 류지호(柳止鎬, 1825~1904)의 아호이기도 하다. 세산(洗山)은 『주역』, 「계사전繫辭傳」에 점치는 의의를 말하면서 “성인이 이로써 마음을 깨끗이 씻어 은밀한 데에 물러나 감추며 길흉 간에 백성과 더불어 근심을 함께하여 신으로써 미래를 알고 지혜로 지난 일을 쌓아두니, 그 누가 여기에 참여하겠는가. 옛날에 총명하고 예지로우며 신무하고 죽이지 않는 자일 것이다.〔聖人以此洗心 退藏於密 吉凶與民同患 神以知來 知以藏往 其孰能與於此哉 古之聰明叡知神武而不殺者夫〕”라고 한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간에 자신의 재능을 숨기면서 조용한 곳에서 홀로 수양함을 뜻한다. 편액의 글씨는 작자 미상의 예서체로 전해진다.

洗를 예서로 쓰고 山은 상형문자를 변용하였다. 서로 다른 자형을 하나의 필체로 통일감을 이룬 형태다. 서체에 구애받지 않는다. 서체는 하나의 무엇을 표현하기 위하여 얼마든지 다른 서체를 활용할 수 있다. 그 무엇이란 곧 서경(書境)이라고 하고 서경이란 시에서 시경(詩境)과 같은 것이란 풀이가 완당 김정희의 주장이다. 이전의 서법이나 편액과 다른 새로운 관점이 있다. 이 편액도 그러한 관점에서 풀어낸 서법으로 보인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전주류씨 존재종택(全州柳氏 存齋宗宅) 소개


류지호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원좌(元佐), 호는 세산(洗山)이다.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1777~1861)의 양자로 들어가 대를 이었다. 한문을 수학하며 1873년 음보로 가감역에 제수되었고 장악원주부, 사헌부감찰, 정릉령, 종묘서령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서 신창현감, 간성현감, 연천군수, 장기현감, 돈녕도정을 지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변복령 등으로 인하여 전국적으로 의병항쟁이 펼쳐지자 안동의진에 참여하였다. 특히 단발령 소식이 안동에 전해지자 서산 김흥락(金興洛), 석호 류도성(柳道性), 척암 김도화(金道和) 등과 함께 「호계통문」을 발의하였다. 그리고 봉정사 회합을 거쳐 1895년 12월(음력) 안동부 삼우당에서 김흥락을 비롯한 여러 유림들과 함께 봉화군 닭실마을의 권세연(權世淵)을 안동의진 대장으로 선임하는 데도 참여하였다. 저서로는 『세산집洗山集』이 있다.

전주류씨 무실파는 시조 류습(柳濕)의 후손으로, 6세손 류윤선(柳潤善, 1500~1557)이 세거지인 서울 묵사동에서 처가인 영주(榮州)로 이거하였고, 장남 류성(柳城, 1533~1560)이 안동 천전리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사위가 되면서 영주에서 무실로 이거하여 이곳에 터전을 형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조선 후기까지 학문‧덕행‧충효 등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문집을 남긴 인물만 120여 명에 이른다. 불천위(不遷位)가 5명(백졸암 류직, 용와 류승현, 삼산 류정원, 호고와 류휘문, 정재 류치명), 문과급제자가 10명, 무과급제제가 5명, 생원진사 33명, 음사로 벼슬한 인물이 39명이었다. 특히 류경시(柳敬時)와 류승현(柳升鉉)은 청백리에 선정되었고 류관현과 류정원은 『목민심서』에 수록될 만큼 치적이 있었다. 류류성은 류복기(柳復起)와 류복립(柳復立) 두 아들을 두었는데, 류복기는 학봉 김성일과 함께 진주성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순국하였다. 류복기는 우잠(友潛)‧득잠(得潛)‧지잠(知潛)‧수잠(守潛)‧의잠(宜潛)‧희잠(希潛)‧시잠(時潛) 등 일곱 아들을 두었는데, 류우잠의 증손인 류봉시(柳奉時, 1654~1709)가 무실에서 분가하여 근처 위동에 터전을 잡았으며 그의 두 아들인 용와(慵窩) 류승현(柳升鉉)과 양파(陽坡) 류관현(柳觀鉉, 1692∼1764) 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함에 따라 재지기반이 확고해졌다. 류승현은 박실[朴谷]에 터를 잡아 박실의 파조가 되었고, 류관현은 한들[大坪]에 터를 잡아 한들의 파조가 되었다. 그리고 류승현의 아들 노애(蘆厓) 류도원(柳道源)과 호곡(壺谷) 류범휴(柳範休), 그리고 수정재(壽靜齋) 류정문(柳鼎文) 3대(代)가 학문과 덕행으로 천거됨으로써 영남의 명문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전주류씨 세거지였던 무실과 박실 마을은 안동시 임동면에 위치해 있으며, 임동면은 원래 임하현에 속한 땅으로 1895년 임동면으로 명칭을 바꾸어 안동군에 편입되었다. 지명은 임하(臨河)의 동쪽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1914년 3개의 동리가 분리되어 임하면이 되었다. 이후 1974년 일부 행정구역의 개편이 있었으며 1995년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아기산의 지맥을 등에 지고 임동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무실과 박실 마을은 영남을 대표하는 반촌이었으나,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400여 년 동안 지켜온 삶의 터전이 물속에 잠기게 되어 부득이 1987년을 전후하여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로 이거하게 되었다.

정재종택은 양파(陽坡) 류관현(柳觀鉉)이 1735년(영조 11) 창건한 집으로 임하댐 건설로 임동면 수곡에서 현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문채, 정침, 행랑채, 사당 등 4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침은 口자형 평면으로 전면의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 반으로 사랑방과 사랑마루, 갓사랑, 책방을 두었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 반으로 안방과 부엌, 찬방, 대청, 누마루, 상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문채는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좌측에 2칸 온돌방이 있고 우측에는 장마루 청판을 깐 2칸 고방이 설치되어 있다. 행랑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의 3량가 맞배지붕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사랑채의 서쪽 두 칸 중 서쪽 방의 처마 밑에는 정재(定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탄와(坦窩) 김진화(金鎭華, 1793∼1850)의 글씨이다. 사랑채 건물의 동쪽 두 칸은 마루방으로 마루방의 동쪽 끝은 나무판 벽으로 막혀 있고 나무판 문이 달려 있는데 그 밖으로 쪽마루가 붙어 있다. 마루방의 처마 밑에는 서쪽으로 양파구려(陽坡舊廬)라는 현판이, 동쪽으로 세산(洗山)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마루 끝에 동쪽으로 막은 처마 밑에는 작은 선반이 올라 붙어 있고 그 안쪽 벽에 여일지승(如日之升), ‘태양처럼 떠오르라’는 편액 글씨가 있다.

참고문헌
  •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문화전자대전
  • 안동민속박물관, 『安東의 懸板』Ⅰ, Ⅱ, 2009.
  • 한국국학진흥원자료부, 『전주류씨 정재고택』, 한국국학진흥원소장 국학자료목록집 33, 2016.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 Ⅱ, 2015.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