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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와(慵窩)

전주류씨 수곡파 용와종택(全州柳氏 水谷派 慵窩宗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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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용와(慵窩)
  • 글자체 행서(行書)
  • 크기 38.5x69.5x5.7
  • 건물명 용와(慵窩)
  • 공간명 성주 벽진이씨 완석정종택(星州 碧珍李氏 浣石亭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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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와(慵窩)

용와(慵窩)


용와(慵窩)는 1710년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박곡리에 세운 용와(慵窩) 류승현(柳升鉉, 1680~1746)의 종택 별당의 편액이다. 1987년 임하댐 건설로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로 옮겼으며, 현재 별당 정자인 침간정(枕澗亭)과 함께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용와’라고 한 것은 작은 집을 지어놓고 게으른 본성을 기르며, 학문의 정진을 게을리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1724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박실[瓢谷]에 집을 짓고 ‘용와’라 이름하고 스스로를 ‘용수’라고 일컬었다. 한편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지은 류승현의 「묘지명」에는 침간정(枕澗亭)의 실(室)을 ‘용와’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어 고증할 필요성이 있다. 편액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용와(慵窩), 게으른 사람의 집이라 스스로 당호를 짓는 것은 겸양의 뜻이다. 글귀의 뜻이 그럴 뿐만 아니라 편액의 글씨를 보고 있으면 만사가 귀찮다는 표정이다. 정통의 필법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필법의 흐트러짐이 없고 마무리에 자득한 법이 있다. 필획이 굳세고 튼튼하다. 토속적이라고 할까, 토기, 옹기, 통나무, 원형질, 이런 이미지가 떠오른다. 문질(文質)이 빈빈(彬彬)해야 군자라 하였다. 문(文)이 질(質)보다 승(勝)하면 세련(史)되고 질(質)이 문(文)보다 승(勝)하면 시골스럽다(野). 그러나 문(文)할 바에는 질(質)이 낫다고 한다. 질(質)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진 용와(慵窩)가 따뜻하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성주 벽진이씨 완석정종택(星州 碧珍李氏 浣石亭宗宅) 소개


류승현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윤경(允卿), 호는 용와(慵窩)이다. 아버지는 류봉시(柳奉時)이고, 어머니는 아주신씨(鵝洲申氏)로 통덕랑 신이징(申以徵)의 딸이다. 1719년(숙종 45)에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1723년(경종3)에 성균관 전적에 올랐으며 곧 예조좌랑으로 옮겼다. 1724년(경종4)에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관직 생활을 하는 몇 년 동안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고 친구를 만나면 시나 지을 뿐이었다. 그래서 서울의 사대부들은 모두 저자가 영남의 유풍을 간직하고 있다고 하였다. 1728년(영조4)에 이인좌난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대장에 추대되었다. 의병을 이끌고 출발하려 할 때 적이 괴멸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 두었다. 1729년(영조5)에 병조정랑에 제수되었다가 사헌부장령으로 옮겼다. 1733년(영조9) 함양부사로 부임하여 거듭된 흉년으로 고통 받는 백성들을 구휼하였고, 유학의 풍습을 떨쳐 일으키며 봉급을 덜어 고을 자재들을 교육시켰다. 1742년(영조18)에 장례원판결사에, 그 해 겨울에 영해부사에 각각 제수되었다. 영해부사로 재직할 당시 관청 창고의 물건을 도난당했는데, 저자가 엄격하게 조사하여 아전 중에서 몇 명을 적발하였다. 적발되지 않은 자가 사단을 내려고 일부러 진상품 인삼을 부실하게 준비하였는데, 그 일로 파직되었다. 1745년(영조21) 공조참의에, 1746년에 풍기군수에 각각 제수되었다. 풍기군수가 되어 임지에 도착하였을 때 흉년이 극심한 것을 보고 곧 상관에게 구황책(救荒策)을 건의하고 돌아와 임소에서 세상을 마치니 향년 67세였다. 죽은 뒤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전주류씨 무실파는 시조 류습(柳濕)의 후손으로, 6세손 류윤선(柳潤善, 1500~1557)이 세거지인 서울 묵사동에서 처가인 영주로 이거하였고, 장남 류성(柳城, 1533~1560)이 안동 천전리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사위가 되면서 영주에서 무실로 이거하여 이곳에 터전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조선 후기까지 학문‧덕행‧충효 등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문집을 남긴 인물만 120여 명에 이른다. 불천위(不遷位)가 5명(백졸암 류직, 용와 류승현, 삼산 류정원, 호고와 류휘문, 정재 류치명), 문과급제자가 10명, 무과급제제가 5명, 생원진사 33명, 음사로 벼슬한 인물이 39명이었다. 특히 류경시(柳敬時)와 류승현(柳升鉉)은 청백리에 선정되었고 류관현과 류정원은 『목민심서』에 수록될 만큼 치적이 있었다. 류성은 류복기(柳復起)와 류복립(柳復立) 두 아들을 두었는데, 류복기는 학봉 김성일과 함께 진주성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순국하였다. 류복기는 우잠(友潛)‧득잠(得潛)‧지잠(知潛)‧수잠(守潛)‧의잠(宜潛)‧희잠(希潛)‧시잠(時潛) 등 일곱 아들을 두었는데, 류우잠의 증손인 류봉시(柳奉時, 1654~1709)가 무실에서 분가하여 근처 위동에 터전을 잡았으며 그의 두 아들인 용와(慵窩) 류승현(柳升鉉)과 양파(陽坡) 류관현(柳觀鉉, 1692∼1764) 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함에 따라 재지기반이 확고해졌다. 류승현은 박실[朴谷]에 터를 잡아 박실의 파조가 되었고, 류관현은 한들[大坪]에 터를 잡아 한들의 파조가 되었다. 그리고 류승현의 아들 노애(蘆厓) 류도원(柳道源)과 호곡(壺谷) 류범휴(柳範休), 그리고 수정재(壽靜齋) 류정문(柳鼎文) 3대가 학문과 덕행으로 천거됨으로써 영남의 명문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전주류씨 세거지였던 무실과 박실 마을은 안동시 임동면에 위치해 있으며, 임동면은 원래 임하현에 속한 땅으로 1895년 임동면으로 명칭을 바꾸어 안동군에 편입되었다. 지명은 임하의 동쪽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1914년 3개의 동리가 분리되어 임하면이 되었다. 이후 1974년 일부 행정구역의 개편이 있었으며 1995년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아기산의 지맥을 등에 지고 임동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박실 마을은 영남을 대표하는 반촌의 하나였는데, 1994년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400여 년 동안 대를 이어 삶의 터전이 물속에 잠기는 비극을 맞았다. 그리하여 배산임수의 구조가 박실과 비슷한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로 이주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련유적으로는 류복기를 제향하는 기양서당(岐陽書堂)과 무실 종택, 류성의 처 의성김씨 정려문, 정재 종택(定齋宗宅), 만우정(晩愚亭)은 임동면 수곡리에 있고, 예안면 주진리에 삼산 종택(三山宗宅)과 삼산정(三山亭)이 있다. 류성의 현손인 류익휘(柳益輝)가 지은 만령초당(萬嶺草堂), 류승현과 류관현 형제가 수학하던 삼가정, 용와 종택과 침간정(枕澗亭), 류장원이 강학하던 동암정(東巖亭), 류건휴가 강학하던 대야정(大埜亭), 류휘문의 고택, 류정문의 고택, 근암(近庵) 류치덕(柳致德)의 고택, 류승현의 현손 류치검의 고택 등은 해평 일선리로 이건하였다.

용와종택은 안채와 사랑채, 광채 및 사각문으로 구성된 ㅁ자형 집이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 반의 ㅡ자형 집으로 폐쇄형의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 2칸 온돌방을 두고 1칸 반의 부엌을 연결시켰다. 안동지방의 양반 가옥 대부분이 ㅁ자 형인데 반해 여기서는 ‘튼 ㅁ자형’ 배치여서 광채가 별도로 마련되었다. 사랑채는 2칸 온돌방과 폐쇄형 마루방을 두었으며 앞쪽으로 툇마루를 두었다. 침간정은 별당 또는 사당 제청의 기능을 수행하는 용도의 3칸 겹집이다. 용와종택 및 침간정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 송지향, 『안동향토지』(대성문화사, 1983)
  • 『안동의 문화유산』 (안동문화원, 1999)
  • 서주석, 『안동문화산책』(이화문화출판사, 2001)
  • 한국학중앙연구원 – 디지털안동문화전자대전
  • 안동민속박물관, 『安東의 懸板』Ⅰ, Ⅱ, 2009.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 Ⅱ, 2015.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