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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모당(敬慕堂)

풍산류씨 파산종택(豊山柳氏 巴山宗宅)

39.0x85.5x4.5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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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경모당(敬慕堂)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39.0x85.5x4.5
  • 건물명 경모당(敬慕堂)
  • 공간명 풍산류씨 파산종택(豊山柳氏 巴山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안동시 풍천면 광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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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모당(敬慕堂)

경모당(敬慕堂)


경모당(敬慕堂)은 풍산류씨(豊山柳氏) 파산(巴山)종택에서 소장하던 편액이다. ‘경모’는 먼 조상을 깊이 존경하고 사모하여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편액의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굳건하고 단정하다. 그러나 억세지 않고 부드럽다. 모가 없이 원만한 외형의 원필을 구사하고 있으나 내부는 밀도 높은 골기의 응축된 에너지를 내포하고 있다. 결자의 구성에도 내부공간은 치밀하고 필획을 절제하여 응축된 느낌을 더해주다. 좌우 글자간의 관계 또한 기세의 들고 남이 원만하여 의미 있는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풍산류씨 파산종택(豊山柳氏 巴山宗宅) 소개


풍산류씨(豊山柳氏)는 풍산현(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의 토성으로 고려 후기에 성장한 전형적인 재지사족이다. 시조인 류절(柳節)로부터 류돈승(柳敦升)·류정장(柳挺莊) 3대에 걸쳐 호장을 역임하였다. 4세인 류백(柳伯)이 은사급제함으로써 토대를 마련하였고, 5세인 류난옥(柳蘭玉)이 창평현령을 역임함으로써 그 토대를 다졌다. 뒤를 이어 6세 류보(柳葆), 7세 류종혜(柳從惠)가 잇달아 실직을 역임함으로써 사족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특히 류종혜 때부터 풍산 읍내에서 하회로 옮겨와 정착함으로써 하회는 풍산류씨 가문의 세거지가 되었다. 풍산에 살던 류종혜가 서쪽으로 10여 리를 옮겨 하회로 들어오려 할 때 입향이 쉽지 않았던 것에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하나는 류종혜의 조부인 류난옥이 먼저 하회에 입향하고자 했으나 적선을 한 뒤라야 들어갈 수 있다는 계시에 따라 류종혜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음덕을 쌓았다는 전설이고, 또 다른 하나는 류종혜가 3년 동안 만인에게 적선을 하고 나서야 입향할 수 있었다는 전설이다.

하회로 옮겨온 풍산류씨는 사회·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여 일족의 세력은 확대되었고 가세는 더욱 부유해졌다. 류종혜의 아들 류홍(柳洪)은 진사 김관(金琯)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김관은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의 부친이고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조부이다. 그러므로 류홍은 김숙자와 처남 매부 간이고 김종직에게는 고모부가 된다. 류홍의 아들 류소(柳沼)는 권옹(權雍)의 사위가 되었는데, 권옹은 이조정랑 배소(裵素)의 사위이며 평창군사를 지낸 관료였다. 류소의 아들 류자온(柳子溫)은 사간 안팽명(安彭年)에게 글을 배우고 사마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의 장인은 청백리로 유명한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으로 연산군 때 대사간을 지내다가 낙향하여 안동 풍산에 은거한 명사이다. 류자온의 아들 류공작(柳公綽)은 간성군수를 지냈으며 연안이씨(延安李氏) 이형례(李亨禮)의 사위였다. 이형례는 대제학을 지낸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의 조부이다. 이와 같이 류종혜로부터 류공작에 이르기까지 하회 류씨들은 조선 전기 영남 지역이라는 제한된 시공간에서 가능한 최정상급 혼맥을 형성하였다. 그러한 혼맥이 결국 류씨 가문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고, 16세기에 입암(立巖) 류중영(柳仲郢, 1515~1573), 겸암(謙庵) 류운룡(柳雲龍, 1539~1601),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 부자를 출현시킴으로써 영남을 대표하는 명문가로 발돋움하였다.

류자온의 손자인 류중엄(柳仲淹, 1538~1571)의 자는 경문(景文)인데, 뒤에 희범(希范)으로 고쳤다. 호는 파산(巴山),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부친은 류공석(柳公奭), 모친은 안동권씨(安東權氏) 권응삼(權應參)의 딸이다. 훗날 류공계(柳公季)의 양자로 들어갔다. 1564년(명종 19) 종형인 입암 류중영이 황해도 감사가 되자 그해 겨울에 종질인 겸암 류운룡, 서애 류성룡과 함께 해주 신광사에 몇 달을 머무르며 공부하였다. 그는 문예가 일찍 성숙하여 늘 여름 글짓기에서 장원을 하였지만, 막상 과거장에 들어가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가리키며 “오늘의 장원은 저 사람이다.”라는 소리를 듣고 답안을 제출하지 않은 채 나왔다.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스승의 뜻에 따라 출사하지 않고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퇴계 선생의 도학에 깊이 심취하여 구절마다 스승의 학문을 찬미하고 흠모하였다.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이 성주목사로 있을 때 덕계(德溪) 오건(吳健)이 교관으로 있었는데, 그는 성주로 가서 덕계 오건을 만나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강론하였다. 이때 퇴계 이황은 황준량에게 답한 편지에 “류중엄은 지향하는 바와 견문 및 학식이 매우 가상하니, 오건과 서로 강론하면 반드시 큰 도움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1564년(명종 19) 청량산 보현암에 있을 때 퇴계 선생이 여러 현사들과 함께 청량산을 유람하였는데, 퇴계 선생을 모시고 가는 곳마다 시를 주고받으면서 인과 지의 더할 수 없는 즐거움을 경험하였다. 이때 주고받은 서찰 30여 통을 수록한「사문수찰師門手札」에는 경전에 대한 논의를 비롯하여 수신제가의 방법과 상례 등 예절에 대하여 질의 응답한 내용들이 들어 있다. 선배들은 일찍이 퇴계 선생 문하에 비지(賁趾) 남치리(南致利)와 류중엄은 타고난 성품이 순진하며 학문을 물음에 간절하고 독실함이 공자 문하의 안자(顔子)와 같다고 하였다. 1571년(선조 4) 세상을 떠나니 향년 34세였다.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의 종손서인 관계로 농암을 향사하는 서원인 예안의 분강서원과 고려 후기 안동 출신의 문신이던 정평공 손홍량의 서원인 안동의 타양서원에 배향되었다. 자손들이 지금까지 불천위로 제사를 받들고 있다.

파산종택은 원래 하회에 있었으나, 류도흥(柳道興, 1894~1946)이 안동시 풍천면 광덕리, 지금의 종택 자리에 있던 초가를 매입하여 정착하면서 옮겼다. 이후 류길영 씨가 지금의 종택 건물을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 류중엄柳仲淹, 「행적行蹟」, 『파산일고巴山逸稿』.
  • 류중엄, 「유사遺事」, 『파산일고巴山逸稿』.
  • 김호종, 『서애 유성룡의 생각과 삶』, 한국국학진흥원, 2002.
  • 김형수, 『풍산류씨 충효당』, 한국국학진흥원, 2009.
  • 이세동, 『충효당 높은 마루, 안동 서애 류성룡 종가』,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1.
  • 유교넷, 유적인물지도(http://www.ugyo.net/tu/rin/ruins.jsp?sSiteCode=anps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