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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락정(枕洛亭)

광산김씨 후조당종가(光山金氏 後彫堂宗家)

43.8x112.3x5.3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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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침락정(枕洛亭)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43.8x112.3x5.3
  • 건물명 침락정(枕洛亭)
  • 공간명 영주 선성김씨 함집당종택(榮州 宣城金氏 咸集堂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이산면 신암리-두암고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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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락정(枕洛亭)

침락정(枕洛亭)


침락정(枕洛亭)은 매원(梅園) 김광계(金光繼, 1580~1646)가 세운 정자의 편액이다. ‘침락’은 ‘낙동강[洛]을 베개로 삼는다[枕]’는 뜻으로, 김광계의 스승인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가 이름을 붙였다. 이 정자는 광산김씨(光山金氏)의 유적들이 모여 있는 오천유적지 내에 있다. 원래는 낙동강에 인접한 오천리(烏川里, 외내)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인해 1974년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편액의 글씨는 해서체로 쓰였다.

반듯하고 굳센 모습이다. 교본을 충실히 습득하고 서법에 따라 하나하나 착실하게 익혀 내공을 쌓았다. 흐트러지지 않는 필획의 진행과 마무리에도 끝까지 모아가는 집중력에 적공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서법 교본에 사용될 듯한 당시의 표준적 서체에 충실하다. 시작하는 기필부분이 다소 과장되게 크게 쓴 형태도 당시 편액 쓰기의 한 양식을 착실히 따르고 있다. 편액이 고풍스럽고 필획이 두툼하여 먹 맛이 상당하다. 착실하고 성실한 모범생의 한 면을 보는 듯하지만 시원하고 가슴을 툭 트이게 하는 어떤 점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영주 선성김씨 함집당종택(榮州 宣城金氏 咸集堂宗宅) 소개


침락정이 자리 잡은 자리 잡은 오천리는 구한말 예안군 읍내면 지역으로 외내, 오천(烏川)이라 하였다. 외내는 마을 앞을 흐르는 시내가 ‘한줄기로 맑은 개울’이었다는 의미이다. 혹은 물이 맑을 때 물 밑에 깔린 돌을 멀리서 보면 검게 보인다고 하여 오천이라 한다. 1914년 무양동 일부와 안동군 북선면의 외감애동 일부, 동후면의 나소곡리 일부를 병합하여 오천동·오천리라 하여 예안면에 편입되었다가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오천리는 3개 리로 구분되어 있다. 오천 1리는 군자리와 방잠의 일부, 오천 2리는 조마리, 이사, 우무실마을이고, 오천 3리는 양정, 신역, 당고개, 지삼마을로 되어 있다. 군자리는 근래에 조성된 광산김씨오천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광산김씨 예안파의 600년 전통 마을이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자 2km 위인 현 위치로 종택, 묘우, 정자, 강당 등의 중요 건물들만 이건하였다.

광산김씨는 원래 전라도 광산에서 고려 후기에 중앙에 진출하였는데, 그 한 파가 경상도 안동으로 와서 풍천의 구담, 와룡의 가구, 예안의 오천 등 세 곳에 뿌리를 내렸다. 오천의 입향 시조는 농수(聾叟) 김효로(金孝盧, 1454~1534)로 풍산 도양골에 살다가 연산군 때 이곳으로 옮겨 정착하였다. 그의 아들 운암(雲巖) 김연(金緣, 1487~1544)과 탁청정(濯淸亭) 김유(金綏, 1491~1555)는 중종 때 명신으로 가문이 융성해지는 데 기틀을 마련하였다. 군자리로 불리게 된 것은 안동부사 한강 정구가 “오천마을은 주민들 모두가 군자 아닌 사람이 없구나.”라고 말한 데서 유래하였다. 특히 오천칠군자는 김연의 아들인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 읍청정(挹淸亭) 김부의(金富儀), 김유의 아들인 산남(山南) 김부인(金富仁), 양정당(養正堂) 김부신(金富信),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 김효로의 외손인 봉화금씨(奉化琴氏) 일휴당(日休堂) 금응협(琴應夾), 면진재(勉進齋) 금응훈(琴應壎) 등의 7인을 가리키는 말로, 모두 김효로의 친손과 외손들이다.

김광계는 자가 이지(以志), 호는 매원(梅園),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부친은 영남 의병대장을 지낸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 1555∼1593)이고, 모친은 진성이씨(眞城李氏) 이재(李宰)의 딸이다. 대암(大菴) 박성(朴惺)을 종유하였다가 나중에 안동부사로 부임한 한강 정구에게 『심경心經』을 질의하고 수학하였으며,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도 출입하였다. 이처럼 김광계는 명망 있는 학자들과 종유하면서 학문을 했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보고 과거의 뜻을 단념하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에도 출사하지 않고 낙동강 가에 침락정을 지어 놓고 학문을 강론하였다. 그러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호소사(號召使) 장현광에 의해 예안의병장에 임명됐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향촌사림에 의해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의병을 인솔해 북상하였으나 남한산성 함락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 조정에서는 김광계의 학행을 높이 사 여러 번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부인은 광주이씨(廣州李氏) 이선악(李仙岳)의 딸이며, 아우 김광실(金光實)의 아들 김렴(金)을 후사로 삼았다. 문집으로 4권 2책의 『매원유고梅園遺稿』가 『오천세고烏川世稿』 속에 들어 있다. 김광계의 묘소는 안동 거인산에 있다.

침락정은 정자보다는 정사의 형태에 가깝다. 마루보다 방의 비중이 더 크며 정자가 가지고 있는 누마루 같은 것도 없다. 그저 마루방이 건물 가운데 위치하고 건물은 남향하여 서 있다. 동쪽과 서쪽과 남쪽 세 방향으로 낮은 쪽마루를 가설하였고, 잡석 기단 위에 방형(方形)의 초석과 기둥을 세웠으며, 납도리 5량 가구에 팔작지붕의 형태를 지녔다. 정면은 4칸인데, 가운데 2칸은 마루방이고, 동쪽 1칸과 서쪽 1칸은 온돌방이 배치된 중당협실형 건물이다. 동쪽 1칸의 앞면 벽과 서쪽 1칸의 앞면 벽에는 통상 크기의 2쪽 방문이 붙어 있다. 방의 뒷벽에는 문이 없다. 정면의 중앙 2칸은 온 벽이 다 4쪽의 긴 방문으로 막혀 있다. 방문의 아래쪽 3분의 1 부분은 판자로 막혀 있고 그 위쪽은 격자무늬 문살이다. 마루에는 판문을 달아 외부와 구분하였다. 우측 계암정 방향에서 침락정으로 들어오는 일각문은 위아래가 타원으로 되어 있는 궁륭(穹窿)형 테두리가 있는 것이 특색이다. 침락정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 안동민속박물관, 『안동의 현판』, 안동민속박물관, 2004.
  • 권진호, 『국역 매원유고』, 성심, 2006.
  • 문화재청(http://www.cha.go.kr)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