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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定齋)

전주류씨 정재종택(全州柳氏 定齋宗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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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정재(定齋)
  • 글자체 초서(草書)
  • 크기 30.0x57.0x3.8
  • 건물명 정재(定齋)
  • 공간명 영일정씨 지수종택(迎日鄭氏 篪叟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영천시 화북면 횡계리 영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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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定齋)

정재(定齋)


정재(定齋)는 류치명(柳致明, 1777∼1861)이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에 건립한 당호 편액으로, 류치명의 아호이기도 하다. 원래 임하 수곡에 있었으나, 임하댐 건설로 이곳으로 이건하였다. 류치명은 「명당실소설名堂室小說」에서 “사물이 각기 자기 자리에 그쳐 있어야 천하가 안정된다. 인(仁)과 경(敬)에 그쳐 있어야 군신의 관계가 안정되고, 효(孝)와 자(慈)에 그쳐 있어야 부자의 관계가 안정되며, 신(信)에 그쳐 있어야 붕우의 관계가 안정된다. 이것은 성인이 천하의 동(動)을 한결같이 한 까닭이다. 자사(子思)는 ‘군자는 현재 자신의 위치에서 행하고, 그 이외의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하였다. 현재 자기 위치에 있다는 것은 그침이다. 그 이외의 것을 바라지 않으면 안정된다. 그러므로 ‘군자는 평이한 일을 하면서 천명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정(定)’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하여 나의 서재를 정재라 명칭 하였다. 정(定)은 곧 그침[止]이다. 그침에 도가 있으니, ‘군자는 돌이켜 자기 몸에서 원인을 찾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또 나의 방을 ‘반구암’(反求庵)이라 명칭 하였다.”라고 하였다. 편액 글씨는 서산 김흥락의 부친인 탄와(坦窩) 김진화(金鎭華, 1793~1850)가 1850년 1월에 쓴 해서체이다.

아담한 편액이지만 그 안의 글씨는 웅장하다. 그러나 군더더기 살집이 없고 맑다. 이처럼 두터운 필획은 붓의 굵기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것은 기필의 필법에서 해결하여야 한다. 이 부분의 작용은 두 필획이 연결되고 만나는 부분에서 더 강하게 작용한다. 따라서 필획이 꺾이고 연결된 곳에서 필법의 개념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글씨의 필법도 그처럼 분명하다. 상부의 점을 서로 다르게 처리한 점이 우선 눈에 띈다. 다르다는 것은 이 정도를 말한다. 예민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만큼 차이로 느낌이 달라지는 것이 묵서이다. 가운데를 비워둔 定자를 의식한 듯 齋는 중앙으로 몰았다. 붓끝은 감추었지만 살아 있다. 단순한 동작, 시원하면서도 중후한 필획 등 필법은 물론이고 화면운용의 기량까지 두루 갖췄다. 좌측 작은 글씨로 쓴 관기에서 서사자의 의도가 드러난다. 좌측 큰 공간을 침해받기 싫다는 뜻이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영일정씨 지수종택(迎日鄭氏 篪叟宗宅) 소개


류치명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백(誠伯), 호는 정재(定齋)이다. 이상정(李象靖)의 외증손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에 증직된 한평(寒坪) 류회문(柳晦文)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 간암(艮巖) 이완(李埦)의 딸이다. 일직 소호리 외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는 동암(東巖) 류장원(柳長源)에서 배우다가 류장원이 죽자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와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다. 1805년(순조 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 성균관전적,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세자시강원문학 등을 거쳐 1831년 전라도장시도사가 되었다. 1832년 홍문관교리에 발탁되었고 1835년(헌종 1) 우부승지가 되었다가 곧 체직되어 부호군에 부직되었다. 1839년 12월에 초산부사에 제수되어 진정(賑政)에 힘쓰고 환곡(還穀)·전결(田結)의 폐단을 교정하는 등 여러 가지 치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몰래 류치명의 초상화를 그려서 생사당(生祠堂)을 세웠는데, 이를 듣고는 곧장 사람을 보내어 훼철하도록 하였다. 1846년에 고산서원에 들어가 향음주례를 행하였고, 1849년 7월에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1853년(철종4) 병조참판에 제수되었는데 이를 사직하면서 올린 소에는 관직자로서의 삶의 자세와 현실에 대한 인식이 집약된 ‘삼강십목三綱十目’을 제시하고 있다. 삼강은 ‘일에 앞서 경계할 것[先事之戒],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爲治之本], 시급히 해야 할 일[急先之務]’이고, 십목은 선사지계(先事之戒)에 ‘안일함을 경계할 것[戒逸豫], 재화를 경계할 것[戒貨財], 아첨을 경계할 것[戒諂佞]’이 있고, 위치지본(爲治之本)에, ‘하늘의 뜻을 체득할 것[體天意], 성왕(聖王)을 법 삼을 것[師聖王], 학문을 부지런히 할 것[勤學問]’이 있으며, 급선지무(急先之務)에 ‘백성들을 구휼할 것[恤民隱], 군정을 정비할 것[修軍政], 공도를 넓힐 것[恢公道], 언로를 넓힐 것[廣言路]’이다. 1855년 장헌세자(莊獻世子 사도세자)의 추존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대사간 박내만(朴來萬)의 탄핵을 받고 평안도 상원으로 유배되어 가는 도중에서 풍기에서 다시 지도로 유배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5월에 지도에 도착한 어려운 환경에서도 평소처럼 평안하게 학문을 익히다가 그 해 11월에 석방되어 12월에 집으로 돌아왔다. 1856년 가의대부의 품계에 올랐으나 나가지 않았다. 1857년 문생들과 자제들이 지어준 뇌암의 만우재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1860년 동지춘추관사가 되고 이듬해 운명하였다.

그는 경학(經學)·성리학·예학(禮學) 등 여러 분야에 정통하여 학문적으로 큰 업적을 남겼다. 특히 성리설에 있어서는 이상정의 학설을 계승하여 이(理)를 활물(活物)로 보고 이의 자발적 동정(動靜)에 의해 기(氣)가 동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이는 능동능정(能動能靜)하는 신용(神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의 자발적 동정으로부터 음양오행의 기가 나오며 이가 우주의 무체적인 실재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있어서는 기발이승(氣發理乘)을 주장한 이이(李珥)의 학설을 공격하였다. 그는 이황(李滉)­김성일(金誠一)­장흥효(張興孝)­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이진상(李震相)·류종교(柳宗喬)·이돈우(李敦禹)·권영하(權泳夏)·이석영(李錫永)·김흥락(金興洛) 등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저서 및 편서로는 『정재문집定齋文集』·『예의총화禮疑叢話』·『가례집해家禮輯解』·『학기장구學記章句』·『상변통고常變通攷』·『주절휘요朱節彙要』·『대학동자문大學童子問』·『태극도해太極圖解』·『대산실기大山實記』·『지구문인왕복소장知舊門人往復疏章』 등이 있다.

전주류씨 무실파는 시조 류습(柳濕)의 후손으로, 6세손 류윤선(柳潤善, 1500~1557)이 세거지인 서울 묵사동에서 처가인 영주(榮州)로 이거하였고, 장남 류성(柳城, 1533~1560)이 안동 천전리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사위가 되면서 영주에서 무실로 이거하여 이곳에 터전을 형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조선 후기까지 학문‧덕행‧충효 등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문집을 남긴 인물만 120여 명에 이른다. 불천위(不遷位)가 5명(백졸암 류직, 용와 류승현, 삼산 류정원, 호고와 류휘문, 정재 류치명), 문과급제자가 10명, 무과급제제가 5명, 생원진사 33명, 음사로 벼슬한 인물이 39명이었다. 특히 류경시(柳敬時)와 류승현(柳升鉉)은 청백리에 선정되었고 류관현과 류정원은 『목민심서』에 수록될 만큼 치적이 있었다. 류성은 류복기(柳復起)와 류복립(柳復立) 두 아들을 두었는데, 류복기는 학봉 김성일과 함께 진주성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순국하였다. 류복기는 우잠(友潛)‧득잠(得潛)‧지잠(知潛)‧수잠(守潛)‧의잠(宜潛)‧희잠(希潛)‧시잠(時潛) 등 일곱 아들을 두었는데, 류우잠의 증손인 류봉시(柳奉時, 1654~1709)가 무실에서 분가하여 근처 위동에 터전을 잡았으며 그의 두 아들인 용와(慵窩) 류승현(柳升鉉)과 양파(陽坡) 류관현(柳觀鉉, 1692∼1764) 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함에 따라 재지기반이 확고해졌다. 류승현은 박실[朴谷]에 터를 잡아 박실의 파조가 되었고, 류관현은 한들[大坪]에 터를 잡아 한들의 파조가 되었다. 류관현 이후의 세계는 류통원(柳通源) → 류성휴(柳星休) → 류회문(柳晦文) → 류치명으로 이어진다.

전주류씨 세거지였던 무실과 박실마을은 안동시 임동면에 위치해 있으며, 임동면은 원래 임하현에 속한 땅으로 1895년 임동면으로 명칭을 바꾸어 안동군에 편입되었다. 지명은 임하(臨河)의 동쪽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1914년 3개의 동리가 분리되어 임하면이 되었다. 이후 1974년 일부 행정구역의 개편이 있었으며 1995년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아기산의 지맥을 등에 지고 임동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무실과 박실마을은 영남을 대표하는 반촌이었으나,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400여 년 동안 지켜온 삶의 터전이 물속에 잠기게 되어 부득이 1987년을 전후하여 이곳으로 이거하게 되었다. 정재종택은 양파(陽坡) 류관현(柳觀鉉)이 1735년(영조 11) 창건한 집으로 양파구려(陽坡舊廬)라고도 한다. 임하댐 건설로 임동면 수곡에서 현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재종택은 대문채, 정침, 행랑채, 사당 등 4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침은 口자형 평면으로 전면의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 반으로 사랑방과 사랑마루, 갓사랑, 책방을 두었고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 반으로 안방과 부엌, 찬방, 대청, 누마루, 상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문채는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좌측에 2칸 온돌방이 있고 우측에는 장마루 청판을 깐 2칸 고방이 설치되어 있다. 행랑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의 3량가 맞배지붕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종택 뒤에는 또 류치명의 묘소도 있다. 정재종택은 원래 대평리에 있었고, 만우정은 사의리에 있었는데,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그 두 곳이 수몰 지역이 되어 여기 묘소가 있던 골짜기 안으로 다 이건하였다.

참고문헌
  • 柳致明, 「名堂室小說」 『定齋集 續集』 卷8
  • 안동민속박물관, 『安東의 懸板』Ⅰ, Ⅱ, 2009.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 Ⅱ, 2015.
  • 한국국학진흥원자료부, 『전주류씨 정재고택』, 한국국학진흥원소장 국학자료목록집 33, 2016.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