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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계(柳溪)

진주강씨 법전 도은종택(晉州姜氏 法田 陶隱宗宅)

31.0x48.0x3.2 / 초서(草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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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류계(柳溪)
  • 글자체 초서(草書)
  • 크기 31.0x48.0x3.2
  • 건물명 류계(柳溪)
  • 공간명 성주 법산 영천최씨 시청당(星州 法山 永川崔氏 視聽堂)
  • 서예가
  • 위치정보 성주 법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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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계(柳溪)

류계(柳溪)


유계(柳溪)는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척곡리에 있는 진주강씨(晉州姜氏) 도은(陶隱)종택의 편액이다. 또한 도은(陶隱) 강각(姜恪)의 7대손인 강명규(姜命奎, 1801∼1867)의 호이기도 하다. 강명규가 지은 「유계정사기柳溪精舍記」에 의하면 유계는 법천(法川)의 옛 명칭으로, 강명규의 부친 강필경(姜必敬)이 큰 집을 지어 아들인 강명규에게 물려주었고, 학업을 익히기에 알맞아 법천의 구호인 유계를 따서 유계정사(柳溪精舍)라 이름 붙였다. 그리고 『예기禮記』, 「단궁檀弓」 하권의 진나라 헌문자(憲文子)가 저택을 신축하여 준공하자 대부들이 가서 축하하였는데, 이때 장로(張老)가 “아름답고 규모가 크도다. 이곳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이곳에 국빈과 종족을 모아 즐기리로다. [美哉輪焉 歌於斯 聚國族於斯]”라고 축원한 구절과 『시경詩經』, 「사간斯干」의 내용을 언급하면서 형제가 화목하고 훌륭한 자손들이 태어나도록 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유계정사에서 인의예지와 오륜의 덕목을 지키는 삶을 살았다. 편액의 글씨는 작자 미상의 초서체이다.

초서의 필획이지만 굳세고 탄탄하다. 그리고 이어감에 급하지 않다. 단아하고 진중한 면모는 서체에 불구하고 편액 공통된 지향점이다. 초서에서도 단아함은 어김이 없다. 유려한 필획과 넓은 공간은 유유자적한 느긋함이 있고 柳의 마지막 세로획의 처리는 溪의 하단부와 함께 유려한 리듬으로 통일감을 유지한 점이 돋보인다. 뿐만 아니라 이 부분은 속도감으로 내달릴 수 있는데도 그러하지 않았다. 당(唐) 서론가 손과정(孫過庭) 의 서보(書譜)에서 글씨에 속도를 중시하며 이를 네 가지로 구분한 언급이 있다. 이중 속도를 낼 수 있는데도 내지 않은 것을 엄류(淹留)라 하며 이를 가장 귀하게 여긴다. 편액의 화면이 이 때문에 더 돋보인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성주 법산 영천최씨 시청당(星州 法山 永川崔氏 視聽堂) 소개


강명규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세응(世應), 호는 유계(柳溪) 또는 정눌거사(精訥居士)이다. 아버지 백와(白窩) 강필경(姜必敬)은 효도와 우애가 깊고 행실이 곧아 마을에서 높은 신망을 받았으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 사민(思敏)의 딸이다. 태어나기 전날 밤에 족대부인 강색(姜𣽤, 1739~1817)이 하늘로부터 흰 용이 내려와 울타리에 부딪히더니 곧장 안방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는데, 사람들은 어질고 사리에 밝은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고 하였다. 외조부 운계(雲溪) 권사민(權思敏)은 감식안이 있어 “이 아이의 행동거지가 떳떳함이 있으니 뒷날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강명규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잠심하여 제자와 백가까지 탐독하여 문장을 성취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를 잘 섬겼다.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과거의 뜻을 버리고 오직 자신의 덕성을 높이는 공부에 전념했고, 강운(姜橒)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특히 『주자전서朱子全書』 읽기를 좋아하였다. 한때 스승 강운의 권유에 따라 과거 공부도 한 바 있었으나 28세 이후로는 과거를 포기하고 스스로 정눌거사라 칭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스승을 따라 의양의 춘풍루에 가서 학문을 토론하고 문답하였는데 문하생들 가운데 단연 으뜸이었다. 1836년(헌종 2) 영남 지방에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사람이 속출하자 가재를 털어 곤궁한 친척을 구제에 힘썼는데 자신도 굶주려서 몸이 여위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1841년 성재정사를 중수하여 지방 수재들의 교육에 힘썼다. 1852년(철종 3)과 1861년에 지방 관리로 추천되어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고, 1855년 윤선거(尹宣擧)와 아들 윤증(尹拯)의 추탈(追奪) 사건에 항의하여 소를 올려 저지운동을 펼쳤다. 또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는 척사(斥邪)할 것을 호소하였다. 평생에 실행하지 않고 말만하는 인사를 싫어했고, 모든 행동에는 공경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학문을 깊이 연구하고 의를 실천함으로써 세인의 추앙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네 명의 아들을 두어 종파의 번성을 꾀함으로써 5부자는 법전 문중의 기반을 다졌다.

진주강씨 법전 문중의 세거지인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은 문수산과 태백산을 끼고 있는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안동부 춘양현에 편입되었다가 순흥부에 속하기도 하였다. 진주강씨가 법전에 터전을 마련하게 된 계기는 한산군수를 역임한 강덕서(姜德瑞, 1540~1614)의 후손인 강윤조(姜胤祖, 1568~1643)와 그의 두 아들 잠은(潛隱) 강흡(姜恰)과 도은(陶隱) 강각(姜恪)이 병자호란의 화를 피하기 위해 법전리로 입향하면서부터이다. 강흡과 강각은 부모님을 모시고 1636년(인조 14) 12월 파주 교하에서 출발하여 1637년(인조 15) 1월 매창(梅窓) 정사신(鄭士信)의 조카사위인 권산기(權山起)의 시골 농장이 있는 법전리 성재미[성잠星岑]에 우거(寓居)하였다. 법전 진주강씨는 음지마을과 양지마을로 나뉘어 마을의 토대를 형성하였는데, 양지마을에는 주로 소론으로 활동했던 강각의 후손들이 거주하였고, 음지마을에는 노론의 당색을 띠었던 강흡의 후손들이 거주하면서 명실상부한 진주강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양지마을에는 도은종택과 해은구택 등이 있으며, 음지마을에는 기헌고택과 경체정 등이 있다.

법전은 괴리 또는 유천이라고 하는데, 법전이라는 지명은 법흥사라는 사찰 앞에 있던 큰 밭을 지칭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으나 법전천의 옛 이름인 유계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즉 유(柳)자의 훈인 ‘버들’이 ‘법(法)’으로 변해 법계(法溪), 법전천(法田川)으로 변했다는 설명이다. 강흡과 강각 형제는 병자호란 이후에도 숭명배청의 대명의리를 실천하기 위하여 파주로 돌아가지 않고 법전에 정착하였다. 이들 형제는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 포옹(抱翁) 정양(鄭瀁), 각금당(覺今堂) 심장세(沈長世), 손우당(遜憂堂) 홍석(洪錫) 등과 함께 태백오현(太白五賢)으로 칭송되어 숭정처사(崇禎處士)로도 불렸다. 또한 강각은 태백오현에 더하여 태백육은(太白六隱)으로 일컬어졌고, 중국 동진 때의 시인 도잠 도연명의 ‘도(陶)’를 따서 ‘도은(陶隱)’이라 자호하였다. 남송을 인정하지 않아 조정에 출사하지 않은 채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어 놓고 은거했다는 도연명의 이야기는 버드나무를 신하의 충절에 빗대는 전통을 낳았다. 따라서 입향조인 강흡과 강각 형제가 견지했던 숭명배청의 의리가 도연명의 고사와 상통하여 법전천의 어원인 유계의 탄생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법전마을은 태백산을 향해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인 비룡승천형의 풍수지리학적 특성을 보인다. 여기에 법전면 풍정리와 봉성면 창평리 사이에 있는 갈방산과 가마봉이라는 두 개의 문필봉을 끼고 있어 문과 급제자 25명(음지마을 13명, 양지마을 12명), 무과 급제자 2명, 소과 합격자 31명과 고시 합격자 13명, 그리고 박사와 학자들을 대거 배출하여 영남의 명문가로서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0호인 도은종택은 강각이 병자호란 후 1639년(인조 17)에 관직을 사퇴하고 태백산 아래 법전 양지마을에 결이 고은 홍송으로 살림집을 지으며 도은구거(陶隱舊居)라 이름 지었다. 1798년 후손 유계 강명규가 집을 증수하였고 근세에도 다시 수리하였다. 현재 안채, 사랑채, 재청, 큰 사당, 작은 사당이 잔존하여 있다. 안채는 산돌로 높직하게 댓돌을 쌓고 그 위에 지어서 매우 훤칠해 보인다. 배치는 ‘ㅁ’자형이며 정면 5칸, 측면 4칸의 구성으로 중앙에 정면 3칸의 대청이 있다. 앞 기둥은 둥근 나무로 만들었는데 약한 배흘림이 있으며 가구(架構)는 5량집이다. 대청 좌측에 윗방, 안방, 부엌 순으로 배열되고 우측에 고방, 작은사랑방과 계자각을 두른 누마루가 계속된다. 사랑채에는 문간과 문간방, 고방, 그리고 사랑방과 마루, 툇마루 순이며 툇마루에는 난간을 설치하였다. 정면 5칸 반, 측면 1칸의 규모이다. 재청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겹처마 팔작기와지붕이다. 2칸의 구들과 마루방 1칸, 앞쪽을 3칸 마루가 차지하고 있는데 난간을 둘렀다. 5량집의 가구이고 기둥 위로 삼포를 얹었는데 원래 구조가 아니라 후대에 개조하였다.

참고문헌
  • 강명규姜命奎, 「유계정사기柳溪精舍記」, 『유계집柳溪集』 권5.
  • 윤광소尹光紹, 「처사강공묘지명處士姜公墓誌銘」, 『소곡선생유고素谷先生遺稿』 권6.
  • 진주강씨 법전문중 응교공 종회, 『진주강씨 법전문중지』, 2015.
  • 김정미, 『진주강씨 법전문중 도은종택 및 석당공』,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국학자료목록집 41,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