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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당(忠孝堂)

풍산류씨 충효당(豐山柳氏 忠孝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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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충효당(忠孝堂)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84.0x196.0x6.6
  • 건물명 충효당(忠孝堂)
  • 공간명 풍산류씨 충효당(豊山柳氏 忠孝堂)
  • 서예가
  • 위치정보 안동시 풍산읍 서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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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당(忠孝堂)

충효당(忠孝堂)


충효당(忠孝堂)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있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 종택의 편액이다. 서애의 증손 우눌재(愚訥齋) 류의하(柳宜河, 1616~1698)가 충효당을 증축한 뒤 당호의 편액를 충효라고 하였다. 류성룡은 임종 직전에 자손들에게 “권하노니, 자손들아 반드시 삼가라. 충효 이외의 다른 사업은 없는 것이니라.[勉爾子孫須愼旃 忠孝之外無事業]”라는 유언시를 남겼다. 류의하는 서애가 평소 강조한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가르침을 받들어 당호를 충효당이라 하였다. 충효의 가치는 서애의 손자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 1598~1674), 증손 류의하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가풍으로 형성되어 후손들에게 면면히 전해졌다. 편액의 글씨는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의 전서체이다.

미수 허목의 전서는 독특하다. 서체로서의 독특함도 있지만 문자의 자형에서도 전통적 소전(小篆)의 자형과도 다른 면모가 있다. 전서는 소전과 대전으로 구분하며, 소전은 진시황의 통일문자를 말하고 대전(大篆)이란 그 이전 춘추전국시기 고문(古文)이 해당된다. 흔히 전서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소전을 말 한다. 미수 허목의 전서는 서체로 볼 때 일반적인 소전을 근본으로 하여 튼튼하고 시원한 필획을 구사하고 있고 동시에 대전인 고문의 풍모인 고졸하고 질박한 점도 일부 포함하고 있다. 이 편액의 글씨는 소전의 시원한 면모 보다 고문의 고졸한 점이 더 부각된 듯하다. 각서자의 좀 더 세밀한 주의가 필요했을까? 미수 전서 본연의 장점이 더 잘 드러날 수가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풍산류씨 충효당(豊山柳氏 忠孝堂) 소개


풍산류씨(豊山柳氏)는 풍산현(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의 토성으로 고려 후기에 성장한 전형적인 재지사족이다. 시조인 류절(柳節)로부터 류돈승(柳敦升), 류정장(柳挺莊) 3대에 걸쳐 호장을 역임하였다. 4세인 류백(柳伯)이 은사급제함으로써 토대를 마련하였고, 5세인 류난옥(柳蘭玉)이 창평현령을 역임함으로써 그 토대를 다졌다. 뒤를 이어 6세 류보(柳葆), 7세 류종혜(柳從惠)가 잇달아 실직을 역임함으로써 사족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특히 류종혜 때부터 풍산 읍내에서 하회로 옮겨와 정착함으로써 하회는 풍산류씨 가문의 세거지가 되었다. 풍산에 살던 류종혜가 서쪽으로 10여 리를 옮겨 하회로 들어오려 할 때 입향이 쉽지 않았던 것에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하나는 류종혜의 조부인 류난옥이 먼저 하회에 입향하고자 했으나 적선을 한 뒤라야 들어갈 수 있다는 계시에 따라 류종혜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음덕을 쌓았다는 전설이고, 또 다른 하나는 류종혜가 3년 동안 만인에게 적선을 하고 나서야 입향할 수 있었다는 전설이다.
하회로 옮겨온 풍산류씨는 사회·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여 일족의 세력은 확대되었고 가세는 더욱 부유해졌다. 류종혜의 아들 류홍(柳洪)은 진사 김관(金琯)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김관은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의 부친이고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조부이다. 그러므로 류홍은 김숙자와 처남 매부 간이고 김종직에게는 고모부가 된다. 류홍의 아들 류소(柳沼) 권옹(權雍)의 사위가 되었는데, 권옹은 이조정랑 배소(裵素)의 사위이며 평창군사를 지낸 관료였다. 류소의 아들 류자온(柳子溫)은 사간 안팽명(安彭年)에게 글을 배우고 사마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의 장인은 청백리로 유명한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으로 연산군 때 대사간을 지내다가 낙향하여 안동 풍산에 은거한 명사이다. 류자온의 아들 류공작(柳公綽)은 간성군수를 지냈으며 연안이씨(延安李氏) 이형례(李亨禮)의 사위였다. 이형례는 대제학을 지낸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의 조부이다. 이와 같이 류종혜로부터 류공작에 이르기까지 하회 류씨들은 조선 전기 영남 지역이라는 제한된 시공간에서 가능한 최정상급 혼맥을 형성하였다. 그러한 혼맥이 결국 류씨 가문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고, 16세기에 입암(立巖) 류중영(柳仲郢, 1515~1573), 겸암(謙庵) 류운룡(柳雲龍, 1539~1601)·서애 류성룡 부자를 출현시킴으로써 영남을 대표하는 명문가로 발돋움하였다.
류의하는 서애 류성룡의 증손자로, 자는 자안(子安), 호는 우눌재(愚訥齋),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부친은 류원지(柳元之), 모친은 의성김씨(義城金氏) 김시추(金是樞)의 딸이다. 1616년(광해군 8)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는 숙조인 수암(修巖) 류진(柳袗)에게 배웠고 성장해서는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64년(현종 5) 천거되어 경기전참봉을 제수받은 이후 봉화현감, 의흥현감, 세자익위사익찬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숙종 15) 세상을 떠나니 향년 83세였다.
보물 제414호로 지정된 충효당은 하회마을 남촌을 대표하는 가옥으로, 1600년대 건립되었다. 서애는 40여 년의 관직 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내려와 살다가 풍산 서미동의 초가삼간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서애 당시 충효당에는 사랑채가 없었다. 이후 서애의 손자 졸재 류원지가 서애의 학덕과 업적을 숭모하기 위해 유림과 제자들의 힘을 모아 먼저 내당을 건립하였으며, 증손 우눌재 류의하에 의해 사랑채가 건립되었다. 행랑채는 서애의 8대손 류상조(柳相祚, 1763~1838)에 의해 건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총 52칸의 건물이며 행랑채 뒤편에 조금 떨어져 ㅁ자형 안채와 그 앞쪽 우측에 돌출한 ㅡ자형 사랑채가 연접되어 자리한다.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사랑채 뒤쪽에는 별동을 이룬 사당이 있고, 오른쪽 대지의 가장 깊은 곳에는 류성룡의 유물 등을 진열·보관하는 영모각이 있다. 충효당은 지을 당시의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어 조선시대 민가 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참고문헌
  • 권진호, 「유교현판이야기 4편-하회마을 충효당」, 안동MBC.
  • 김형수, 『풍산류씨 충효당』, 한국국학진흥원, 2009.
  • 유교넷, 유적인물지도(http://www.ugyo.net/tu/psn/man.jsp?sMan_Code=10288)
  • 이세동, 『충효당 높은 마루, 안동 서애 류성룡 종가』,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