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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당(忠孝堂)

순천김씨 충효당(順天金氏 忠孝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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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충효당(忠孝堂)
  • 글자체 행서(行書)
  • 크기 51.0x88.5x6.7
  • 건물명 충효당(忠孝堂)
  • 공간명 순천김씨 충효당(順天金氏 忠孝堂)
  • 서예가
  • 위치정보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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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당(忠孝堂)

충효당(忠孝堂)


충효당(忠孝堂)은 운악(雲嶽) 이함(李涵, 1554~1644)이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 건립한 당호의 편액이다. 충효당은 재령이씨(載寧李氏) 종택의 사랑채로 정침의 좌편에 위치하고 있다. 종택은 원래 재령이씨 영해 입향조인 이애(李璦, 1480~1561)가 지었는데, 뒤에 손자인 이함이 1604년에 뒤쪽 높은 현 위치로 이건하고서 충효당이라 이름 붙였다. ‘충효’는 맹자의 오륜설을 적어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에게 주면서 “충성심을 고무하고 효심을 일깨워야 한다.[課忠責孝]”라고 강조한 것에서 따온 것이다. 이재(李栽)의 「충효당기忠孝堂記」에 따르면 이함이 자손의 교육을 위해 1602년 건물을 짓고 충효당이라 불렀다. 충효당이란 세 글자는 중국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제작한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 현판은 오랜 세월이 지나 모양이 변하자 6세손 이인배(李仁培)가 선본(善本)을 찾아 새로 판각했다고 한다. 현판의 글씨는 해서체이다.

2미터에 이르는 대형 편액이다. 글씨는 편액이 좁아 보일 만큼 차고 넘친다. 한 글자의 높이가 84센티미터, 눈어림으로 봐도 획 하나의 두께가 20센티미터라면 일반적인 붓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두터운 필획에 군더더기 살집이 보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시작도 마무리도 섬세하고 내부공간의 구성도 작은 글씨보다 더 뛰어난 치밀함에 놀랍고 그럼에도 내외부의 기세 흐름이 원만하여 소통이 시원하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독특한 풍모를 지녔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순천김씨 충효당(順天金氏 忠孝堂) 소개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남향 마을이다. 과거 인구가 많을 때는 인량3리로 나누어져 있었다. 인량은 삼한시대에 우시국(于尸國)이라는 부족국가의 도읍지여서 나라골, 국동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마을 뒷산의 지형이 마치 학이 날개를 펴고 날아갈 듯한 형국과 같다고 하여 조선 초에는 비개동, 조선 중엽에는 익동으로 부르다가 1610년에 예부터 명현이 많이 배출되는 마을이라고 하여 인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영해부지寧海府誌』에 의하면 인량리는 팔성종실(八姓宗室)이 거주하고 있는 곳으로 예부터 풍속이 순후하고 예의와 겸양이 있고 효행과 학문이 높은 선비가 많아 벼슬이 끊어지지 않으니 부내에서 으뜸가는 동리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서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인상동, 인하동을 병합하여 인량동으로 하고 영덕군 창수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인량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며 현재 행정구역상 인량 1, 2리로 분동되었다. 인량리 산기슭 아래 서당골에는 재령이씨 영해파 충효당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안동권씨(安東權氏) 권만두(權萬斗)의 종택인 지족당 및 신안주씨(新安朱氏) 종택인 만괴헌과 함양박씨(咸陽朴氏) 종택인 소택정이 있다. 윗나라골에는 우계(愚溪) 이시형(李時亨)의 우계종택을 필두로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태어난 자운정과 청송에서 옮겨온 갈암종택이 있다. 윗나라골에서 서쪽으로 산기슭 아래에는 서산정과 청계정이 있다. 윗나라골에는 재령이씨들의 가옥이 많은 가운데 동쪽으로 안동권씨 권상임(權尙任)의 종택인 강파헌과 같은 안동 권씨인 오봉종택이 위차하고 있다. 개울을 건너 동쪽으로 위치한 아랫나라골에는 영양남씨(英陽南氏) 종택인 처인당과 그 아래에 영천이씨(永川李氏) 종택인 삼벽당이 위치한다. 삼벽당 아래에는 선산김씨(善山金氏) 종택인 용암종택이 있다.

재령이씨는 경주 이씨 이알평(李謁平)에서 시작되었는데, 고려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이우칭(李禹偁)이 재령군(載寧君)에 봉해지면서 그 후손들은 재령을 본관으로 삼았다. 연산군 연간에 이애(李璦)가 영해 부사로 부임하는 숙부 이중현(李仲賢)을 따라 영해로 내려 왔다가 이 고을의 진성백씨(眞城白氏) 백원정(白元貞)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후 자손들이 영해에 터전을 잡게 되었다. 이애가 바로 영해의 입향조이고, 이함(李涵)은 그의 손자이다.

이함은 자가 양원(養原), 호는 운악이다. 부친은 이은보(李殷輔)이고, 모친은 이순응(李舜應)의 딸이다.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에게 수학했고,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등과 교유했다. 1588년 생원시에 합격했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흉년까지 겹쳐 굶어 죽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재산을 털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했다. 이때 순찰사 한효순(韓孝純)이 안동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진보를 지나가는데 군사들이 끼니를 거르자 이함은 쌀 수십 섬을 운반하여 그들을 먹여주었다. 명나라의 장수 남유격(覽遊擊)이 성주에 진을 치고 있을 때 그 병사들의 횡포가 심하였다. 성주 목사는 견디지 못하고 떠나고 아전과 백성도 도망쳐 숨는 자가 많았다. 이때 순찰사가 김천도 찰방으로 있는 이함에게 성주 고을을 겸해서 보게 하여 폐단을 바로잡았다. 1607년 의령 현감으로 부임해서 임진왜란 때 소실된 향교를 복원하고 교육에 힘썼다. 1600년 문과에 급제했으나 책문에 『장자莊子』의 문자를 썼다고 해서 파방 되었다. 1609년 다시 문과에 급제했는데, 광해군의 혼란한 정치로 고향으로 돌아와 대청을 충효당이라 하고 죽리관(竹裏館:西山亭)을 짓고 후진을 이끄는 데 진력하였다. 이함은 자손들에게 학문을 소중히 여기고 이욕을 경계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선대의 훈계를 잊지 말고 학문에 힘쓰며 이욕의 길로 가지 말라. 충의와 신실함을 집안 대대 전승하도록 힘쓰라.”라고 훈계하였다. 이함의 부인은 진성이씨(眞城李氏) 이희안(李希顔)의 딸이다. 5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이시청(李時淸), 이시형(李時亨), 이시명(李時明), 이시성(李時成), 이시진(李時震)이고, 사위는 김우(金遇), 박안복(朴安復)이다. 묘소는 영덕군 창수면 한밭[大田]에 있다. 저술로 2권 1책의 『운악집』이 있다.

충효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종택의 건물들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높은 기단 위에 우뚝 세워져 있다. 오른쪽 모서리에 ㄱ자 형으로 2칸 반 규모의 온돌방이 있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마루이다. 대청 쪽에 면한 방에는 사분합들문, 쌍여닫이문을 달아 문을 모두 열면 마루와 함께 넓게 사용할 수 있다. ㄱ자 형의 방 전면 오른쪽에는 한 단 높은 툇마루를 설치해 평소 책 읽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대청의 전면에는 분합문을 달아 폐쇄적인 느낌이 강한데 전면을 개방하고 卍자 형 난간을 돌린 툇마루가 이런 폐쇄적인 느낌을 감소시켜 준다. 이재(李栽)의 「충효당기忠孝堂記」에서는 “충효당은 8칸인데 동쪽으로 두 칸은 온돌방이고, 서쪽으로 여섯 칸은 대청이다. 동쪽 끝은 조그마한 누각이 있는데 또한 두 칸이다.”라고 설명했는데, 현재 동쪽 방의 작은 누각 2칸은 없어졌다. 충효당종택은 1984년 국가민속문화재 제168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 이함 저, 운악선생문집국역간행소 역, 『국역 운악선생문집』, 충효당, 1992.
  • 목심회, 『우리 옛집(경상도)』, 도서출판 집, 2015.
  • 문화재청(http://www.cha.go.kr)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목판아카이브(http://mokpan.ugyo.net/hyunpan/)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