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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당(養正堂)

광산김씨 양정당종가(光山金氏 養正堂宗家)

52.7x85.2x6.3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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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양정당(養正堂)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52.7x85.2x6.3
  • 건물명 양정당(養正堂)
  • 공간명 광산김씨 양정당종가(光山金氏 養正堂宗家)
  • 서예가
  • 위치정보 도생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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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당(養正堂)

양정당(養正堂)


양정당(養正堂)은 금역당(琴易堂) 배용길(裵龍吉, 1556~1609)이 설립한 도생서당(道生書堂) 강당에 걸려 있던 편액이다. ‘양정’이란 『주역』, 「몽괘蒙卦」의 “몽(蒙)의 도(道)로써 바른 덕성을 기르는 것이 곧 성인(聖人)의 길에 들어가게 하는 공(功)이 된다.[蒙以養正 聖功也]”라고 한 것에서 따왔다. 편액 글씨는 작자 미상이며 해서로 쓰였다. 도생서당의 ‘도생’이란 마을의 옛 이름인 본곡(本谷)에서 연유하였는데, ‘본(本)’이란 『논어論語』, 「학이學而」 편에 “군자는 근본에 힘을 써야 하니, 근본이 바로 서야 도가 생겨난다.[君子務本 本立而道生]”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도생서당은 예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도목촌에 있었는데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었다. 도목촌에 있었던 금역당의 사당과 종가는 1973년 현재의 위치인 안동시 송천동으로 이건하였다. 금역당 종가는 배용길의 부친인 배삼익(裵三益, 1534∼1588)의 호를 따서 임연재(臨淵齋)종택이라고도 부르며 흥해배씨(興海裵氏) 안동 입향조인 배상지(裵尙志)의 호를 따서 백죽(柏竹)고택이라고도 한다. 편액의 글씨는 작자 미상이며 해서로 쓰였다.

기상이 웅장하고 훤칠하다. 큰 붓을 깊이 사용하여 굳센 필획을 구사하면서도 기필과 수필의 동작이 치밀하고 정확하다. 동작은 절제되어 간결하고 필세는 살아 생기 넘친다. 글자의 구성과 공간운용에 방정함이 있어 단정하고 반듯하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광산김씨 양정당종가(光山金氏 養正堂宗家) 소개


금역당 배용길의 종택이 있는 안동시 송천동은 솔뫼, 논골, 포진(浦津), 선어대(仙魚臺), 원당골, 하리(下里)를 포함한 지역이다. 솔뫼는 안동대학교 서쪽, 송천들의 북편에 있는 마을로, 대학촌이 형성되어 전통 마을보다 더욱 커진 송천동의 중심 마을이 되었다. 논골은 안동대학교 본부 건물의 남쪽, 대학 진입로 동쪽에 있는 마을로 가장 활성화된 대학촌이다. 이 마을은 흥해배씨, 용궁전씨(龍宮全氏)들이 살고 있으며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의 묘가 마을 안에 있다. 포진은 보나리라고도 하며 안동대학교 동쪽에 있는 마을로 강릉유씨(江陵劉氏), 안동권씨(安東權氏), 평해황씨(平海黃氏), 흥해배씨 네 성씨가 마을을 개척하였다. 부산에서 소금배가 들어와서 소금을 내리고 양곡을 싣고 가는 나루터이며, 길안·의성 방향(남쪽)으로 건너가는 나루터기 때문에 포진이라 하였다. 포진은 중요한 길목이었기 때문에 포진 지역의 산기슭에 토성을 쌓았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포진에는 또한 기우정이라는 우물이 있어 가뭄 때 이 우물에 음식을 넣어 비를 내리게 했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 우물은 지금도 간이상수도 집수정(集水井)으로 사용하고 있다. 선어대는 옛날 선녀가 내려 와서 놀았다고 하여 선녀대라고도 하였으며, 그 뒤 깊은 소(沼)에 고기가 많이 있다고 하여 선어대라고도 하였다. 원당골은 솔뫼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당이 있어 원당골이라 했으며, 한성부 자윤을 지낸 송서인(宋瑞橉)의 재사가 있다. 하리는 1450년경 반변천이 극심한 홍수로 인하여 물길이 바뀌고 당시의 강변이 퇴적되어 농토가 조성되면서 마을로 이루어졌다. 송천동의 자연 마을 중 제일 아래에 위치하였다 하여 하리라 한다. 명륜동에 있던 안동의 향교가 안동사범학교, 구안동대학교, 안동시청 등으로 바뀌면서 향교는 이 하리에 새로 지어졌다.

흥해배씨는 배경분(裵景分)을 시조로 하지만, 흥해라는 관향과 연결되는 것은 6대 배전(裵詮)이 조적(曺頔)의 난을 평정하는데 참여한 공로로 충혜왕 때 1등 공신의 훈작을 받았고, 공민왕 때 익재좌명공신의 훈작을 받고 흥해군에 봉해진 것에서 시작하였다. 7대 백죽당 배상지(裵尙志) 형제가 고려말 두문동에서 칩거하다가 외가인 안동 금계로 낙향하였다. 금계로 내려와서 고려가 망함에 이르자 측백나무[栢]와 대나무[竹]라는 두 글자를 써서 당호를 백죽당이라고 함으로써 고절한 기개를 드러냈다. 송천동의 흥해배씨 가문은 배상지 가계의 종손 집이기도 하다. 10대 배임(裵袵)이 금계에서 풍기의 미가암리로 이주하였고, 11대 배이순(裵以純)이 풍기에서 봉화로, 13대 배천석(裵天錫)이 봉화에서 안동의 도목촌으로 이주하였다. 배천석은 배삼익(裵三益), 배삼근(裵三近) 두 아들을 두고 있는데, 임연재종택은 배천석과 배삼익 부자가 도목촌으로 입향하면서 지은 집이다.

배용길은 자가 명서(明瑞), 호는 금역당, 본관은 흥해(興海)이다. 배용길은 배천석의 손자이다. 부친 배삼익과 모친 영양남씨(英陽南氏) 남신신(南藎臣)의 딸 사이에서 장남으로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부친에게 수학하였으며 류성룡(柳成龍), 조목(趙穆), 남치리(南致利) 등을 종유하였다. 1585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588년 부친을 따라 황해도 감영에 갔다가 얼마 뒤 부친상을 당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을 도와 김해(金垓)를 의병장으로 세우고 자신은 부장이 되어 의병을 일으켰다. 1594년 세자익위사세마에 제수되었고 1598년 안기도찰방이 되었다. 1602년 문과에 급제한 뒤 예문관검열을 거쳐 예문관대교가 되었다. 이후로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 머물며 강학 활동에 전념하였다. 1607년 충청도사가 되었다. 이때에 고니[天鵝]를 진상하는 일이 호서(湖西) 백성에게 가장 큰 고통이었는데, 배용길이 순찰사에게 말하고 상소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세상을 떠난 뒤 1630년 선무 원종공신에 녹훈되고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금역당 사당 및 종가는 본채와 금역당, 사당 등 3채로 구성되어 있다. 종택의 본채는 정면 5칸, 측면 6칸이고 금역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이며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집이다. 본채의 안방에 연속되는 온돌방은 모두 3칸인데 ㄱ자로 꺾여 있어 안마당을 향한 전망이 잘 고려된 특이한 배치 형식이다. 안방을 북쪽에 두지 않고 남쪽에 둔 것도 남쪽 창을 통한 채광을 고려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반적인 관념을 벗어나 있다. 별당이자 제청인 금역당은 ㅡ자형 겹집으로 남쪽은 겹 4칸으로 밀집형 온돌을 구성하였고, 북쪽 4칸은 칸막이 없는 대청으로 되어 있다. 대청의 대들보에는 임연재(臨淵齋), 도목촌(桃木村)이라는 이황의 친필 편액이 걸려 있다. 사당은 엄정한 격식을 잘 갖춘 건물이며, 사당 뜰의 정원수도 격조가 있다. 단층 맞배기와 지붕집으로 양측 박공 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금역당 종가는 1973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 배용길 저, 장재호 역, 『금역당집』, 한국국학진흥원, 2013.
  • 이종서, 「흥해배씨 종가 금역당(琴易堂)의 건축과 조선후기의 구조 변화-건축이념 및 실용성과 관련하여-」, 『건축역사연구』 제25권, 한국건축역사학회, 2016.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목판아카이브(http://mokpan.ugyo.net/)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
  • 문화재청(http://www.cha.go.kr/)
  • 디지털안동문화대전(http://andong.grandculture.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