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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습재(時習齋)

안동권씨 병곡종택(安東權氏 屛谷宗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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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시습재(時習齋)
  • 글자체 행서(行書)
  • 크기 53.0x98.5x7.6
  • 건물명 시습재(時習齋)
  • 공간명 안동권씨 병곡종택(安東權氏 屛谷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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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습재(時習齋)

시습재(時習齋)


시습재(時習齋)는 안동권씨(安東權氏) 병곡(屛谷)종택에서 기탁하였으며 조선 전기의 문신인 권주(權柱, 1457∼1505)가 생전에 살던 집의 편액이다. ‘시습’은 『논어』, 「학이편學而篇」의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 [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는 구절에서 따왔으며 주자의 주(註)에 “습(習)은 새가 자주 나는 것이니, 배우기를 그치지 않음을 새가 자주 나는 것과 같이 하는 것이다.[習 鳥數飛也 學之不已 如鳥數飛也]”라고 하였다. 권주가 갑자사화의 파장으로 죽임을 당한 뒤 한동안 빈 집으로 방치되었다가 17세기 말 병곡(屛谷) 권구(權榘)가 다시 들어와 살았다. 지금 있는 건물은 150여 년 전에 다시 세운 것이다.
편액의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습(習) 자를 풀어 ‘새가 날기를 자주 연습하는 것[조삭비야鳥數飛也]’이라 하였다. 동작이 머뭇거리고 필획이 심하게 떨린다. 설마 어린 새의 날개 짓을 연상한 것은 아닐 것이다. 굳세고 강한 필치이나 상부 점의 형태, 연결부분의 처리에서 자연스럽고 무리 없이 이어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안동권씨 병곡종택(安東權氏 屛谷宗宅) 소개


권주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지경(支卿), 호는 화산(花山)이다. 아버지는 권이(權邇), 어머니는 송원창(宋元昌)의 딸이다. 8세에 사서를 읽었고 10여 세 무렵에는 경사(經史)에 두루 통한 신동이었다. 13세에 경상감사가 보는 안동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였는데, ‘아운다기봉’이라는 시제에 따라 7언 24구의 과체시를 능숙한 솜씨로 지어 바쳤다. 당시 경상감사는 장원을 한 권주의 나이가 너무 어린 것에 의심을 품고 앵두가 담긴 쟁반을 가리켜 운(韻)을 불러주고 시를 지으라고 하니, 권주가 즉석에서 “동글동글한 예쁜 과일 금 쟁반에 가득한데 붉은색은 술 취한 서시의 뺨보다 아름답네. [圓圓嘉果滿金盤 色奪西施醉後顔]”라고 읊어 경상감사를 다시 한 번 놀라게 하였다. 그는 1474년(성종 5) 18세의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481년(성종 12) 친시문과에 갑과 2등으로 급제하였다. 1482년(성종 13) 승정원주서를 역임한 이후 강경문신으로 활약하였다. 1489년(성종 20) 공조정랑 재직 중 질정관이 되어 요동을 내왕했으며 같은 해 11월 지평이 되었다. 1492년(성종 23) 6월 사간원헌납이 되었으며 1493년(성종 24) 부응교에 승진하였다. 같은 해 12월부터 다음 해 8월에 걸쳐 경차관이 되어 대마도를 내왕하였다. 귀환 뒤 사헌부로부터 사행(使行) 때 체통을 잃었다고 탄핵을 당했으나 용서받았고 곧 응교에 승진하였다. 1494년(성종 25) 12월 직제학 표연말(表沿沫), 전한 양희지(楊熙止)와 함께 「대행왕행장大行王行狀」을 지어 임금에게 올리고 1495년(연산군 1) 3월 다시 「대행왕시책大行王諡冊」을 지어 올렸으며 같은 해 8월에 집의가 되었다. 1498년(연산군 4) 7월 통훈대부에 오르면서 직제학지제교 겸 경연시강관을 역임하였다. 1499년(연산군 5) 2월에 찬진된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같은 달 홍문관부제학으로 올랐다. 승정원우부승지와 우승지를 거쳐 1501년(연산군 7) 1월에는 도승지에 승진되었고 같은 해 윤7월 충청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 1502년(연산군 8) 10월부터 이듬해 3월에 걸쳐 동지중추부사로서 하정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03년(연산군 9) 4월 동지중추부사로서 동지성균관사를 겸임했고, 같은 해 10월 경상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윤4월 정축일 갑자사화가 발발하면서 1482년(성종 13) 당시 연산군 생모인 폐비 윤씨(尹氏)의 사사(賜死) 때에 승정원주서로서 사약을 받들고 갔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같은 달 경진(庚辰)일에 사사시켜야 한다는 전지가 있었으나 유순(柳洵) 김수동(金壽童) 등이 “권주는 당시에 주서로 단지 승지의 지휘에 따랐을 뿐이다.”라는 계(啓)를 올려서 권주는 사형을 면하고 곤장 70대의 장형을 받은 뒤 평해로 귀양 보내졌다. 그러나 1505년(연산군 11) 6월 13일 폐비 윤씨의 사사 때에 사약을 받들고 간 일이 거듭 논죄되면서 결국 사사되었다. 남편의 소식을 전해들은 부인 고성이씨(固城李氏)는 높은 누에서 뛰어내려 자결하였고, 권주의 형제자매도 아울러 외방에 부처되었다. 중종 때 억울한 처지에서 풀려 우참찬이 증직으로 내려졌다.

권주의 장남은 권질(權礩, 1483∼1545)인데, 자는 사안(士安), 호는 사락정(四樂亭)이다. 아버지 권주가 갑자사화에 사사당함으로 인해 그 역시 예안으로 정배되어 9년간의 유배 생활을 하였다. 이때 권질에게 어린 딸이 있었는데 이 일로 충격을 받아 넋이 나간 사람이 되었다. 딸의 혼사를 걱정하던 권질은 유배 생활로 친하게 지낸 퇴계 이황을 찾아갔다. 이황은 이때 부인 김해허씨(金海許氏)를 잃은 후 3년상을 막 마친 상태였다. 권질은 이황에게 “자네가 아니면 내 딸을 맡길 사람이 없으니 자네가 내 딸을 맡아 주게.”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이황은 부탁을 순순히 받아들여 권씨 부인이 타계할 때까지 14년간 함께 살았으며 권씨 부인을 잃은 뒤로는 더 이상 부인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가곡리는 풍산현에 속하였으나 1895년 안동군 풍서면에 편입되었고, 1914년 가일(佳日), 지곡(枝谷)촌, 갈전리의 일부와 풍남면의 하회리의 일부를 합하였다. 가일과 지곡의 마을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와서 가곡이라 이름 하였다. 가곡리는 가곡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다. 가곡 1리는 가일, 시골, 논동골[魯洞], 도가걸 등 4개의 마을이고 가곡 2리는 선원(仙原·仙安), 중리(中里), 평장골, 못밑 등 4개의 마을이다. 가일마을은 안동권씨 복야공파(僕射公派) 권항(權恒)이 입향한 이후 약 600여 년 동안 이어진 안동권씨의 동성마을이다. 가일은 옛날에 지곡이라 불렸고, 안동권씨와 순흥안씨(順興安氏)가 사이좋게 땅을 갈라서 사는 집성마을이다. 마을 뒷산인 정산을 바라보며 오른쪽에 안동권씨가, 왼쪽에 순흥안씨가 터를 잡았다. 이곳을 지곡이라 부른 까닭은 권(權)은 가지가 많아야 번성한다는 뜻에서였으나, 훗날 풍산들의 아침 해가 아름다워 가(佳)로 바꾸었다 한다. 정산에 당이 있어 안일과 풍년을 기원하는 정월 보름날 당제(堂祭)를 지냈으나 현재 지내지 않는다. 정산은 가일을 감싸고 있는 산이다. 『영가지永嘉誌』에 “거물산 동쪽에 있다. 산 위에 오래된 우물이 있어 정산이라 한다.”고 하였고, 『팔역지八域志』에 ‘정산지하활만인(井山之下活萬人)’이라 하였지만, 지금은 찾을 수 없다. 마을 입구 왼편 가일못 둑에 큰 회나무가 있는데, 이 아래에서 학동들이 글공부를 했다 하여 학자수(學者樹)라 한다.

병곡종택은 시습재라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데, ‘7대 동안 금부도사가 세 번 찾아온 영남의 유일한 집’으로 알려져 있다. 갑자사화에 휘말린 20대 권주,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21대 권전(權磌, 1486~1521), 그리고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 때 금부도사가 와서 27대 권구(權榘, 1672~1749)를 서울로 압송해 갔다. 대문은 따로 없고 축담 사이의 터진 부분으로 들어서면 바로 바깥마당이다. 집은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바깥마당을 앞쪽에서 일선으로 막고 선 사랑채, 그 뒤쪽에 붙어선 안채, 오른편에 키 낮은 담장을 두르고 있는 사당이 그것이다. 사랑채는 정면 6칸 규모이다. 동쪽 끝의 1칸은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대문이고 서쪽 끝의 1칸은 중문이다. 그 안쪽으로 동쪽 2칸은 마루이고 서쪽 2칸은 방이다. 처마 밑에는 시습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 사랑채의 당호일텐데, 붓을 떨듯이 꾹꾹 눌러서 멋을 부린 글씨이다. 검은 판에 흰 글씨이다. 대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좁은 안마당이 나온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양쪽으로 방을 놓고 중안에 마루를 배치하였다. 서쪽 끝 방으로부터 아래로 건물이 더 연장되어 사랑채와 만나며, 동쪽 끝은 1칸을 더 내밀어 방을 짓고는 그 아래 작은 측문을 두고 그 끝으로부터 낮은 울타리를 꺾어 돌려 사랑채 동편의 벽과 연결시켰다. 집의 동북쪽 모서리를 차지하는 것은 사당이다. 마을 길 쪽의 모서리를 차지하는 셈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로 앞쪽의 3분의 1칸은 그저 기단 위에 기둥만을 세워 놓았고, 그 뒤쪽으로 사당의 문과 벽이 자리 잡고 있다. 키 낮은 담장으로 둘러쳐 4각의 독립 공간을 만들었다. 앞쪽에 사랑으로 드는 작고 아담한 솟을대문이 있다. 원래 이 집에는 대문간에 오른편으로 따로 사랑채가 자리 잡고 있었지만, 60년 전에 철거하여 오늘의 모습이 되었다. 넓은 바깥마당은 그렇게 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겠다. 현재 문화재자료 제370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참고문헌
  • 『논어』.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
  •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지음, 『안동 가일 마을 –풍산들가에 의연히 서다』,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