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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백당(傳白堂)

창녕성씨 계서당(昌寧成氏 溪西堂)

34.0x84.0x3.1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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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전백당(傳白堂)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34.0x84.0x3.1
  • 건물명 전백당(傳白堂)
  • 공간명 진성이씨 망천파문중(眞城李氏 輞川派門中)
  • 서예가
  • 위치정보 안동시 풍산읍 마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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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백당(傳白堂)

전백당(傳白堂)


전백당(傳白堂)은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에 있는 계서당종택 사랑채인 계서당(溪西堂) 측면 대청에 걸려 있는 편액이다. ‘전백’은 청백(淸白)을 전수받는다는 말로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 1595~1664)의 청렴결백을 깊이 새긴다는 의미이다.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 1643~1719)은 계서의 묘갈명에 “신하의 도는 세 가지가 있으니 임금을 섬길 때는 충성과 정직이요, 백성을 다스릴 때는 자애와 은혜요, 관직에 있을 때는 청렴결백이다. 계서공이 능한 것은 진실로 이 세 가지이고, 능하지 못한 것은 명예와 지위를 취하는 것이다. …… 곧기가 쇠화살 같으니 계서공에게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깨끗하기가 백옥 같은 눈과 같으니 계서공에게 무슨 티가 있겠는가. …… 저들 가운데 어느 권세 있는 이가 나아갈 길을 통제하랴만 빼앗을 수 없는 것은 계서공의 청백리 이름이로다.”라며 성이성의 청렴결백을 높이 칭송하였다. 또 강계 백성들 역시 ‘계서청백인정비’라는 송덕비를 세워 “사문에 우리 원님 천성이 강직하고 공정하였네. 뜻은 청렴과 검소에 두어 스스로 절약을 실천했네.”라며 성이성의 청렴결백을 높이 칭송하였다. 따라서 ‘전백’에는 관직생활 동안 높은 수준의 청렴결백을 견지하여 훗날 ‘청백리’에 녹선된 성이성의 청백정신이 오롯이 담겨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청백정신을 본받고 실천하고자 하는 후손들의 마음 역시 반영되어 있다.

서체는 해서이지만 행서의 필의가 있다. 필획이 끊어져도 흐름은 이어져 굳건한 필획이 튼튼하다. 시작과 마무리가 스치듯 편하게 지나간 필획이 보인다. 특히 傳과 白에서 그렇다. 이런 글씨 정도를 쓰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가벼이 대하고자 한다. 글씨 한 점으로 자신의 모든 인생을 평가받는다는 식의 자세는 너무 무겁다. 무거울수록 내면을 억누르게 되고 가벼울수록 숨어있던 속이 나올 수 있다. 같은 사람이라도 이런 모습도 보이고 저런 모습도 보이는 게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그런 탓인지 傳白 두 글자는 수채화처럼 담백하다.
그러나 반면에 堂에서는 필획의 동작이 분명하게 보인다. 앞 두 글자에 대한 가벼운 마음이 걸렸을 것이다. 이 경우 전체를 다시 쓰지 않고 마지막 堂자를 통하여 이를 보완하였다. 결과적으로 편액 전체는 담백한 맛이면서 가볍지 않게 되었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진성이씨 망천파문중(眞城李氏 輞川派門中) 소개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에 있는 창녕성씨(昌寧成氏) 계서공파(溪西公派)는 원래 경상남도 창녕에서 살았다. 그러나 성이성의 부친 부용당(芙蓉堂) 성안의(成安義, 1561~1629)가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지금까지 세거하게 되었다. 성안의는 1591년(선조 24) 문과에 급제하였지만, 이듬해 임진왜란이 발발해 화왕산성에서 곽재우(郭再祐)와 김륵(金玏)의 막하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그러던 중 부인 장수황씨(長水黃氏)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 상심하자 이를 지켜본 김륵이 자신의 종손녀인 선성김씨(宣城金氏)와 재혼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성안의 가족은 밀양에서 김륵의 향리이자 처가가 있던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로 임시 피난하였고, 성안의는 다시 창녕으로 돌아와 의병을 일으켰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내외직으로 분주하였던 성안의는 1613년(광해군 5)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로 이주하여 계서당을 짓고 정착하였다.

물야면은 봉화읍 북쪽에 위치하며, 가평은 너른 들을 갖추고 있는 지역이다. 이곳은 적어도 세 곳의 물길이 합류하는 지점이자 적어도 세 개의 큰 산들이 흘러내려 만나는 지점이다. 산록에서 흘러내려 오는 물은 가평 쪽으로 흘러 저수지에 모여 가평의 들을 적시며 결국 내성천으로 합류한다. 가평의 들은 만석산의 남쪽 산록과 응방산의 북동쪽 산록 사이에 펼쳐져 있고, 그 사이를 가평 두문 사이의 봉화군 1번 군도가 나누어 준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만석산 쪽으로는 계서당이 위치하고, 응방산 쪽으로는 구만서당이 위치한다.

성이성의 자는 여습(汝習), 호는 계서(溪西)이며 부친은 성안의, 모친은 선산김씨(善山金氏) 김계선(金繼先)의 딸이다. 그는 1595년(선조 28) 지금의 봉화군 동면 문단리에서 태어났으며 13세 때 정경세(鄭經世)에게 보이자 크게 될 인물이라 하였다. 자라면서 학문에 더욱 정진하여 김굉필(金宏弼)과 이연경(李延慶)의 학통을 이은 강복성(康復誠)에게 수학하였다. 1616년(광해군 8)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627년(인조 5) 문과에 급제하였다. 1637년(인조 15) 사간원헌납이 되어 윤방(尹昉), 김류(金瑬), 심기원(沈器遠), 김자점(金自點)의 오국불충(誤國不忠)의 죄를 논하기도 하였다. 사간을 역임하는 동안 직언으로 일관하여 주위의 시기를 받아 승진이 순조롭지 못하기도 하였다. 진주목사 시절 어사 민정중(閔鼎重)의 선치(善治) 보고로 표리(表裏 옷의 속감과 겉감)를 받았으며 강계 부사 때는 삼세(蔘稅)를 모두 면제해 주어 백성들로부터 관서활불(關西活佛)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외직으로 담양, 진주, 강계, 창원 등 네 고을을 다스린 그는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네 곳 모두 선정비가 세워졌다. 1645년(인조 23) 청나라 사행길에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왔다. 부인 봉화금씨(奉化琴氏) 금개(琴愷)의 딸 사이에 성갑하(成甲夏, 1621~1685), 성문하(成文夏, 1638~1726), 성대하(成大夏, 1647~1724) 세 아들을 두었다. 세상을 떠난 뒤 1786년(정조 10) 오천서원에 배향되었지만, 이 서원은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문집으로 2권 1책의 『계서선생일고溪西先生逸稿』가 있는데, 후손 성종진(成鍾震)이 1863년(고종 1)에 간행하였다.

1984년 국가민속문화재 제171호로 지정된 계서당종택은 사랑채인 계서당을 좌측면에 놓고 안채와 날개채를 붙인 ㅁ자 형태를 띠고 있다. 성안의가 처음 지을 때는 초가였으나, 성이성의 장남 성갑하가 충재(沖齋) 권벌(權橃)의 후손인 권석충(權碩忠)의 딸에게 장가들면서 처가의 도움을 받아 지금 모습의 종택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안채와 사랑채, 사당, 문간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안채는 정면 5칸으로 측면 3칸은 대청이며 좌우 2칸은 안방과 상방이 대칭으로 놓였다. 사랑채인 계서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집으로 후대에 증축·개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면 3칸과 좌측면 2칸에 ㄴ자형 마루를 설치하였고 기둥 바깥으로 난간이 있는 좁은 마루를 두었다. 마루 뒤쪽에는 사랑방, 책방, 사랑윗방을 배치하였으며 마루 양쪽 측면은 널판으로 벽을 만들어 각 칸에 문을 달았다. 이 건물의 특이한 점은 사랑채의 툇마루 끝에 주인이 바깥에 나가지 않고 소변을 볼 수 있도록 판자로 3면을 막고 바닥을 뚫었는데, 지금 항아리는 보이지 않지만 예전에는 바닥 아래에 항아리를 놓아 간이화장실로 썼을 것이다.

설성경 교수는 『계서선생일고』와 성이성의 4대손 성섭(成涉, 1718∼1788)이 지은 『필원산어筆苑散語』의 내용을 기초로 다른 여러 자료를 검토하여 성이성이 판소리 춘향가의 인물인 이몽룡의 모델임을 밝혔다. 1607년 부친 성안의가 남원 부사에 임명되어 5년 동안 남원을 다스렸는데, 이 시기에 성이성이 부친의 임기 내내 함께 남원에 있었으니 그의 나이 13세에서 18세라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를 토대로 현재 계서당은 이몽룡의 생가로 주목받고 있다.

참고문헌
  • 성이성, 『계서선생일고』.
  • 설성경, 『민족고전 「춘향전」의 원류, 봉화 계서 성이성 종가』, 예문서원, 2017.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
  • 문화재청(http://www.ch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