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 편액
  • 공간별 보기

후조당(後彫堂)

광산김씨 후조당종가(光山金氏 後彫堂宗宅)

58.5x130.5x7.9 / 해서(楷書)MORE

의견달기 URL
목록 이전 기사
  • 자료명 후조당(後彫堂)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58.5x130.5x7.9
  • 건물명 후조당(後彫堂)
  • 공간명 전주류씨 호고와종택(全州柳氏 好古窩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안동시 임동면 마재-구미 해평 일선리
  •  
r0137_1.jpg
후조당(後彫堂)

후조당(後彫堂)


후조당(後彫堂)은 겅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에 있는 광산김씨(光山金氏) 예안파(禮安派) 종택에 딸린 별당의 편액이다. 이 건물은 광산김씨 예안파 입향조인 농수(聾叟) 김효로(金孝盧, 1454~1534)가 지었는데, 그의 손자 김부필(金富弼, 1516~1577)이 퇴락한 건물을 중수하고 뜰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은 뒤 후조라 당호를 지었다.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후조’는 『논어』, 「자한子罕」에서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송백이 뒤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라고 한 데서 따왔다. 추위가 엄습하면 온갖 초목들이 잎을 떨어뜨려서 추운 시절을 지나가지만 오직 송백 같은 침엽수는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평소처럼 푸른 잎을 드러낸다. 추위 같은 역경이 닥쳐야 송백처럼 지조와 절의를 굽히지 않는 참군자의 모습을 갖춘 사람을 알아볼 수 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굳세고 힘찬 기운이 넘치는 글씨다. 글씨가 편액 공간을 채우고도 남는다. 글씨와 공간의 관계는 생각보다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글씨의 주변 가장자리까지의 공간이 좁으면 화면은 확대되어 글씨 내부가 크게 부각되고 더 역동적이 된다. 반대로 그 공간이 크고 넓으면 화면은 축소되어 원거리로 보이고 화면은 정적이고 적막한 느낌이 된다. 이 편액의 거리는 전자에 해당되는 전형적인 사례다. 전문 서가의 솜씨로 보인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전주류씨 호고와종택(全州柳氏 好古窩宗宅) 소개


후조당이 자리 잡은 오천리는 구한말 예안군 읍내면 지역으로 외내, 오천(烏川)이라 하였다. 외내는 마을 앞을 흐르는 시내가 ‘한줄기로 맑은 개울’이었다는 의미이다. 혹은 물이 맑을 때 물 밑에 깔린 돌을 멀리서 보면 검게 보인다고 하여 오천이라 한다. 1914년 무양동 일부와 안동군 북선면의 외감애동 일부, 동후면의 나소곡리 일부를 병합하여 오천동·오천리라 하여 예안면에 편입되었다가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오천리는 3개 리로 구분되어 있다. 오천 1리는 군자리와 방잠의 일부, 오천 2리는 조마리, 이사, 우무실마을이고, 오천 3리는 양정, 신역, 당고개, 지삼마을로 되어 있다. 군자리는 근래에 조성된 광산김씨오천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광산김씨 예안파의 600년 전통 마을이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자 2km 위인 현 위치로 종택, 묘우, 정자, 강당 등의 중요 건물들만 이건하였다.

광산김씨는 원래 전라도 광산에서 고려 후기에 중앙에 진출하였는데, 그 한 파가 경상도 안동으로 와서 풍천의 구담, 와룡의 가구, 예안의 오천 등 세 곳에 뿌리를 내렸다. 오천의 입향 시조는 농수(聾叟) 김효로(金孝盧, 1454~1534)로 풍산 도양골에 살다가 연산군 때 이곳으로 옮겨 정착하였다. 그의 아들 운암(雲巖) 김연(金緣, 1487~1544)과 탁청정(濯淸亭) 김유(金綏, 1491~1555)는 중종 때 명신으로 가문이 융성해지는 데 기틀을 마련하였다. 군자리로 불리게 된 것은 안동부사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가 “오천마을은 주민들 모두가 군자 아닌 사람이 없구나.”라고 말한 데서 유래하였다. 특히 오천칠군자는 김연의 아들인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 읍청정(挹淸亭) 김부의(金富儀), 김유의 아들인 산남(山南) 김부인(金富仁), 양정당(養正堂) 김부신(金富信),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 김효로의 외손인 봉화금씨(奉化琴氏) 일휴당(日休堂) 금응협(琴應夾), 면진재(勉進齋) 금응훈(琴應壎) 등의 7인을 가리키는 말로, 모두 김효로의 친손과 외손들이다.

후조당의 주인 김부필은 자가 언우(彦遇), 호는 후조당(後彫堂)이며 부친은 운암(雲巖) 김연(金緣, 1487~1544), 모친은 창녕조씨(昌寧曺氏) 조치당(曺致堂)의 딸이다. 부인은 진주하씨(晉州河氏) 하취심(河就深)의 딸이다. 김부필은 22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며 정치적 포부를 키웠다. 그러나 부친상(29세), 인종의 승하(30세), 조모상(33세), 모친상(41세) 등 왕성하게 활동할 시기를 가정사로 인해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이후 출사의 포부를 단념하고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6년(51세) 사관, 1568년(53세) 효릉참봉, 1569년(54세) 정릉참봉에 제수되었지만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이황은 김부필이 축적한 학문의 경지를 인정하며 출사를 권유하였지만, 김부필은 도리어 거처에 후조당이라 편액하고 자신의 지향을 밝혔다. 이에 이황은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김부필의 지조에 대해 칭송하였다.

후조당 주인은 본래부터 절개 굳세어
임명장 도착해도 기뻐하는 마음 없네
빙설 속에 피어난 매화 향과 마주 앉아
도의 근원 깨닫고 읊조리길 그치지 않네

後凋主人堅素節
除書到門心不悅
坐待梅花氷雪香
目擊道存吟不輟

이와 같이 이황은 김부필이 맑은 풍모와 곧은 절개를 지키며 처사적인 인간 자세를 견지하는 것을 인정해 주었다. 김부필 역시 이황이 세상을 떠나자 문하의 동문들과 이황의 저술을 모아 책으로 편찬하는 일에 매진하는 한편 도산서원을 건립하는 일을 열성적으로 추진하였다. 1822년(순조 22)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1824년(순조 24) 스승 이황과 똑같이 문순(文純)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문집으로 6권 3책의 『후조당선생문집後彫堂先生文集』이 있다.

후조당은 광산 김씨 예안파 종택의 별당으로, 종택은 별당, 정침, 사당, 재사, 창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 정침에 부속된 건물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집이다. 평면은 서쪽의 6칸 대청에 동쪽의 2칸 온돌방을 결합하여 몸체로 삼고, 다시 2칸 온돌방에 남쪽으로 마루 1칸과 온돌방 1칸을 차례로 붙여 익랑(翼廊)을 만들어 전체가 ㄱ자형의 평면을 이루도록 하였다. 정침 왼쪽 담장 안에 있으며, 정침으로 통하는 협문과 정문을 갖추었고 왼쪽에는 사당으로 통하는 신문(神門)이 있다.

참고문헌
  • 권진호, 「후조당 김부필의 삶과 시세계」, 『국학연구』 제30집, 한국국학진흥원, 2016.
  • 『안동의 명현당호』, 안동민속박물관, 2000.
  • 안병결 외, 『군자리, 그 문화사적 성격』, 토우, 2001.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