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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은구려(海隱舊廬)

봉화 법전 진주강씨 해은공파(奉化 法田 晉州姜氏 海隱公派)

34.0x124.0x4.8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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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해은구려(海隱舊廬)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34.0x124.0x4.8
  • 건물명 해은구려(海隱舊廬)
  • 공간명 진주강씨 해은공파 박사댁(晉州姜氏 海隱公派 博士宅)
  • 서예가
  • 위치정보 봉화 법전 척곡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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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은구려(海隱舊廬)

해은구려(海隱舊廬)


해은구려(海隱舊廬)는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척곡리에 있는 진주강씨(晉州姜氏) 해은공파 박사댁에서 소장하던 편액이다. 해은(海隱) 강필효(姜必孝, 1764∼1848)의 당호 편액이자 그의 호이다. 강필효는 「전서해은게벽篆書海隱揭壁」의 “땅이 좁아 넓은 바다에 살고, 은거하며 불평한 마음을 울리네. 운세를 점치며 달이 뜨길 기다리고, 도를 걱정하며 황하가 맑아지길 기다리네. [褊壤仍居海 隱淪鳴不平 考占候月昴 憂道俟河淸]”라는 시를 읊조리며 자신의 호를 해은이라 명명한 이유에 대해서 밝히고 있는데, 이는 당호의 의미와 같다. 해은구택(海隱舊宅)은 1750년(영조 26)경에 지었다가 1900년경에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중건하였다. 편액의 글씨는 작자 미상의 예서체이다.

필획 간 간격이 균일하고 파책은 장식성이 생략되어 전서의 면모가 있다. 그러나 필법은 전서와 다른 예서의 방필(方筆)을 사용하여 전서의 잔재가 남아 있는 예서 즉, 고예(古隷)의 범주에 속한다. 뿐만 아니라 자형이 종으로 길쭉한 점은 전서의 맛이고 횡획을 가로로 시원스럽게 반복적으로 사용한 점은 예서의 맛이다. 고예의 독특한 풍모를 개성 있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비교적 크지 않는 편액에 네 글자를 긴밀하게 쓰고도 답답하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엄정한 공간분할의 계산이 치밀하기 때문인 듯하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진주강씨 해은공파 박사댁(晉州姜氏 海隱公派 博士宅) 소개


강필효의 본관은 진주(晉州), 초명은 강세환(姜世煥), 자는 중순(仲順), 호는 해은(海隱)·법은(法隱)이다. 아버지는 강식(姜植)이고 어머니는 진성이씨(眞城李氏) 이중연(李重延)의 딸이다. 그는 명재(明齋) 윤증(尹拯)의 제자인 성건재(省愆齋) 강찬(姜酇)과 소곡(素谷) 윤광소(尹光紹)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00년(정조 24) 집 동쪽에 창주 경의재를 모방하여 서재를 짓고 주자의 「백록동규白鹿洞規」와 성혼의 「우계서실의牛溪書室儀」를 써서 걸고 윤증의 「획일도畫一圖」를 준칙으로 삼아 운영하니 사방에서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1803년(순조 3)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순릉참봉에, 1814년(순조 14) 세자익위사세마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842년(헌종 8) 조지서별제에 임명되었다가 곧 충청도도사로 옮겼으며 이듬해 돈령부도정에 이르렀다. 강필효는 사서, 육경, 여러 성리서를 깊이 연구한 끝에 천명(天命)은 이(理)로 말하는 경우도 있고, 기(氣)로 말하는 경우도 있으며 또 이기선후설(理氣先後說)에 있어서도 이선기후(理先氣後)와 기선이후(氣先理後)가 모두 가능하며 이기는 서로 체용(體用)이 된다는 이기론(理氣論)을 전개하였다. 저술로는 『고성현고경록古聖賢考經錄』, 『조사속록造思續錄』, 『소계회화록素溪會話錄』, 『석척록夕惕錄』, 『사유록四遊錄』, 『경서고이經書考異』 등이 있으며 문집으로 『해은유고海隱遺稿』 22권 12책이 있다. 또 퇴계 이황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과 「청량산가淸凉山歌」를 한역하였다. 강필효는 윤증(尹拯) → 윤동원(尹東源) → 윤광소(尹光紹) → 강필효(姜必孝) → 성근묵(成近黙)으로 이어지는 소론계의 학문을 집대성하였다.

진주강씨 법전 문중의 세거지인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은 문수산과 태백산을 끼고 있는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안동부 춘양현에 편입되었다가 순흥부에 속하기도 하였다. 진주강씨가 법전에 터전을 마련하게 된 계기는 한산군수를 역임한 강덕서(姜德瑞, 1540~1614)의 후손인 강윤조(姜胤祖, 1568~1643)와 그의 두 아들 잠은(潛隱) 강흡(姜恰)과 도은(陶隱) 강각(姜恪)이 병자호란의 화를 피하기 위해 법전리로 입향하면서부터이다. 강흡과 강각은 부모님을 모시고 1636년(인조 14) 12월 파주 교하에서 출발하여 1637년(인조 15) 1월 매창(梅窓) 정사신(鄭士信)의 조카사위인 권산기(權山起)의 시골 농장이 있는 법전리 성재미[성잠星岑]에 우거(寓居)하였다. 법전 진주강씨는 음지마을과 양지마을로 나뉘어 마을의 토대를 형성하였는데, 양지마을에는 주로 소론으로 활동했던 강각의 후손들이 거주하였고, 음지마을에는 노론의 당색을 띠었던 강흡의 후손들이 거주하면서 명실상부한 진주강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양지마을에는 도은종택과 해은구택 등이 있으며, 음지마을에는 기헌고택과 경체정 등이 있다.

법전은 괴리 또는 유천이라고 하는데, 법전이라는 지명은 법흥사라는 사찰 앞에 있던 큰 밭을 지칭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으나 법전천의 옛 이름인 유계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즉 유(柳)자의 훈인 ‘버들’이 ‘법(法)’으로 변해 법계(法溪), 법전천(法田川)으로 변했다는 설명이다. 강흡과 강각 형제는 병자호란 이후에도 숭명배청의 대명의리를 실천하기 위하여 파주로 돌아가지 않고 법전에 정착하였다. 이들 형제는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 포옹(抱翁) 정양(鄭瀁), 각금당(覺今堂) 심장세(沈長世), 손우당(遜憂堂) 홍석(洪錫) 등과 함께 태백오현(太白五賢)으로 칭송되어 숭정처사(崇禎處士)로도 불렸다. 또한 강각은 태백오현에 더하여 태백육은(太白六隱)으로 일컬어졌고, 중국 동진 때의 시인 도잠 도연명의 ‘도(陶)’를 따서 ‘도은(陶隱)’이라 자호하였다. 남송을 인정하지 않아 조정에 출사하지 않은 채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어 놓고 은거했다는 도연명의 이야기는 버드나무를 신하의 충절에 빗대는 전통을 낳았다. 따라서 입향조인 강흡과 강각 형제가 견지했던 숭명배청의 의리가 도연명의 고사와 상통하여 법전천의 어원인 유계의 탄생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법전마을은 태백산을 향해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인 비룡승천형의 풍수지리학적 특성을 보인다. 여기에 법전면 풍정리와 봉성면 창평리 사이에 있는 갈방산과 가마봉이라는 두 개의 문필봉을 끼고 있어 문과 급제자 25명(음지마을 13명, 양지마을 12명), 무과 급제자 2명, 소과 합격자 31명과 고시 합격자 13명, 그리고 박사와 학자들을 대거 배출하여 영남의 명문가로서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해은구택은 강필효의 조부 강곽(姜漷)이 1750년(영조 26)에 건축하였다. 건물 구조는 ㅁ자형으로 안채는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강필효의 증손자인 강제(姜濟, 1826~1919)가 1900년경 화재로 소실되자 다시 건립한 건물로 사랑채는 구재(舊齋)를 사용하였다. 사방으로 돌담장이 있으나 일부는 훼손된 것을 2014~2015년에 걸쳐 정부의 지원으로 중수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문화대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강필효姜必孝, 「선조고도은부군항적先祖考陶隱府君行蹟」, 『해은선생유고海恩先生遺稿』 권20.
  • 윤광소尹光紹, 「처사강공묘지명處士姜公墓誌銘」, 『소곡선생유고素谷先生遺稿』 권6.
  • 진주강씨 법전문중 응교공 종회, 『진주강씨 번전문중지』, 2015.
  • 김정미, 『진주강씨 법전문중 도은종택 및 석당공』,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국학자료목록집 41,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