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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당(聽天堂)

인동장씨 여헌종택(仁同張氏 旅軒宗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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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청천당(聽天堂)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55.0x115.0x4.1
  • 건물명 청천당(聽天堂)
  • 공간명 우계이씨종택(羽溪李氏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동화 도촌리 사제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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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당(聽天堂)

청천당(聽天堂)


청천당(聽天堂)은 경상북도 구미시 인의동에 있는 인동장씨(仁同張氏) 여헌(旅軒)종택의 별당 편액이다. 장응일(張應一, 1599~1676)의 호이기도 한데, ‘청천’은 곤궁과 출세, 장수와 단명 등의 세상만사를 오직 천명에 맡기고 자신의 분수를 만족하며 안빈낙도하여 세속의 득실을 마음에 두지 않고 오직 하늘에 뜻에 따른다는 뜻이다. 장응일은 「청천와聽天窩」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내 삶의 운명이 하늘에 달려 있지 않은가
곤궁·출세·장수·단명 무엇이건 천명 아니랴
그 속에서 스스로 나의 분수를 만족하노니
세상만사 이제 하늘의 뜻에 맡길 뿐이라오

不有人生命在天
竆通脩短孰非天
箇中自足安吾分
萬事如今只聽天

또한 장대윤(張大胤)은 「과정록략過庭錄畧」에서 증조부 장응일이 만년에 세속의 득실을 마음에 두지 않고 안빈낙도한 삶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부군(장응일)께서는 조정의 의논이 분열되어 시사가 어렵고 위태함을 보시고 전원으로 물러나 사시면서 벼슬에 뜻을 끊으셨다. 만년에는 월곡의 선산 아래 집을 지어 ‘청천와’라고 현판을 걸고 안빈낙도를 하시면서 세속적인 득실에 마음을 두지 않으셨다.”

聽과 堂 두 글자와 가운데 天 자의 기세가 다르다. 양쪽 두 글자는 안으로 거두어 절제한 필획이 탁월하고 天은 밖으로 드러내 좌우로 끝으로 펼치는 형세다. 聽과 堂은 내부공간이 짜임새 있는 긴밀한 구성이고 天은 성글다. 양쪽 두 글자는 튼튼한 기둥처럼 좌우를 막고 서있고 天은 그 안에 있다. 유유자적하는 듯 가운데 편액의 중앙 공간은 오롯이 天의 영역이 되었다. 하늘의 소리를 듣고자 하는 당호 주인, 주인 그 사람을 쓰고자 하는 서사자의 마음은 天에서 떠날 수 없음이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우계이씨종택(羽溪李氏宗宅) 소개


인동장씨 여헌종택은 고려 때 벽상공신에 책록된 신호위 상장군 장금용(張金用)의 후손이다. 그 후손들이 옥산에 정착하여 본관을 옥산(玉山)으로 삼았다가 옥산이 인동으로 개칭됨에 따라 인동이 관향이 되었다. 고려 말 장안세(張安世)는 함흥부윤과 덕녕부윤을 지냈는데, 함흥부윤으로 재직할 때 치수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홍수의 범람을 막았으며 만세교라는 70여 칸 규모의 큰 다리를 세웠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개국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하였다. 이런 절의로 인하여 그는 별세 후 수백 년이 지난 1834년(순조 34) 충정(忠貞)이란 시호를 받았고 세상에서 이른바 두문동 72현의 한 분으로 추앙되었다.

장안세의 손자 장수(張脩)는 조선조의 벼슬에 나아가 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하였는데, 부친이나 조부와 달리 그가 조선조의 벼슬에 나간 것은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다. 성품이 매우 강직하였던 장수는 거침없이 바른 말을 하며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했으나 여의치 않아 고향으로 돌아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장보(張俌)와 장우(張俁) 두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 장우가 바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의 5대조이다. 장우는 인동장씨 남산파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인동장씨들이 옥산을 중심으로 한 인동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시조 장금용 때부터지만, 인동장씨 가운데 한 파인 남산파가 현재 종택이 위치하는 인동 남산 아래에 자리 잡은 것은 장우 때부터이기 때문이다. 장우의 아들 장승량(張承良)은 부친이 터를 잡아 놓은 남산을 떠나 성주 암포(지금의 성주군 월항면 안포리)로 이주하였는데, 남산파가 암포와 인연을 맺은 것은 장승량의 조부인 장수가 암포에 살던 판양양부사 이번(李蕃)의 딸과 혼인을 하면서부터이다. 성주 암포로 이주하였던 남산파가 다시 인동 남산으로 돌아온 것은 장승량의 증손 장렬(張烈) 때이다.

장렬은 증조부 장승량이 서울에서 내금위 어모장군으로 있던 시절에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20세가 된 뒤 성주 암포로 귀향하였다가 암포의 근거지를 아우 장희(張熙)에게 맡기고 다시 옛날에 살던 인동 남산으로 거처를 옮겨 남산파의 터전을 다시 닦았다. 여헌의 부친인 그는 죽정(竹亭) 장잠(張潛)과 함께 집안 간의 계를 만들고 족보를 편찬했으며 선조 묘소에 제사를 지내고 집안 간 친목을 도모하였다. 뿐만 아니라 매월 초하루마다 자제들을 이끌고 학문을 강론하고 암송함으로써 집안의 학문·문화적 위상을 높이는 데도 노력을 기울였다.

장응일의 자는 경숙(經叔), 호는 청천당(聽天堂),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생부는 장현도(張顯道)지만 여헌 장현광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1629년(인조 7)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고 정언, 지평, 필선 등을 역임하였다. 1646년(인조 24) 헌납으로 있을 때 이미 사사(賜死)의 명이 내린 민회빈 강씨의 구명상소를 9일 동안 계속하였다. 1649년(효종 1) 장령으로 대사간 김경록(金慶祿), 집의 송준길(宋浚吉) 등과 함께 훈신 김자점(金自點)의 탐욕과 방자함을 탄핵하였다. 1673년(현종 14) 공조참의로 영릉(寧陵)의 변의 진상을 밝히려다가 오히려 무고당하여 횡간에 유배되었다. 숙종이 즉위한 뒤 석방되어 부제학, 대사간 등을 지냈다. 그는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태계(台溪) 하진(河溍)과 교유가 깊었고 통혼도 이루어졌다. 1621년(광해군 13) 박민(朴敏), 허돈(許燉)과 함께 덕천서원을 심방하여 수일 동안 강학하였고,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와 망년지우를 맺었으며 그의 아들 홍상문(洪相文)과 홍상민(洪相民)을 손녀사위로 맞이하였다. 한편 장현광의 사후에 장현광의 고제들과 함께 유문의 간행과 원향의 추진 등 현양 사업에 앞장서서 여헌학단이 확산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청천당은 모원당 옆 나지막한 축대 위에 있는 건물로 모원당, 사당과 함께 2000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90호로 일괄 지정되었고 2005년 완전 해체하고 새로 지었다. 정면 3칸, 측면 1.5칸에 홑처마로 이루어진 팔작지붕 건물이며 앞에 마루를, 가운데 있는 대청 양쪽에 방을 하나씩 두었다. 문화재청 등이 작성한 각종 안내문에는 “여헌의 아들 청천당 장응일이 학문을 닦고 교유의 공간으로 사용하기 위해 1607년(선조 40) 세웠다.”고 적혀 있지만, 잘못된 내용이다. 왜냐하면 1607년에는 장응일이 아직 9세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였고, 장대윤의 「과정록략」과 장현광의 「인의방설仁義坊說」 및 종가 문서들의 기록을 살펴보면 장응일은 성주 월곡에다 청천와를 지어 생활하였다. 이는 그의 손자인 장만기(張萬紀) 대까지 이어지다가 장만기가 월곡에서 다시 인동 남산으로 옮겼다. 이렇게 볼 때 장만기가 남산으로 옮겨 온 후의 어느 시점에 월곡에 있던 청천와를 계승하여 남산에 다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 장현광, 「모원당기」, 『여헌집』 권9.
  • 장현광, 「청천와」, 『여헌집』 권1.
  • 장대윤, 「과정록략」, 『여헌집』 권5.
  • 이종문, 『모원동 회화나무, 구미 여헌 장현광 종가』,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1.
  • 『편액』, 한국국학진흥원,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