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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월재(松月齋)

봉화 전주이씨 송월재 종택(奉化 全州李氏 松月齋宗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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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송월재(松月齋)
  • 글자체 행서(行書)
  • 크기 48.5x80.0x6
  • 건물명 송월재(松月齋)
  • 공간명 영주 뒷새 진주강씨 소우종택(榮州 뒷새 晉州姜氏 小愚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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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월재(松月齋)

송월재(松月齋)


송월재(松月齋)는 이시선(李時善, 1625~1715)이 만년에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풍정리 명동마을에 건립한 서재의 편액이다. ‘송월’은 이시선의 호로, 모든 식물이 시들어버린 뒤에도 시들지 않는 소나무[松]의 늘 푸른 절개와 기울었다 찼다를 반복하는 한결같은 달[月]의 의미를 취해 지었다. 이시선은 「송월자전松月子傳」에서 “소나무가 굳센 절개를 지녀 자기가 지키는 바를 바꾸지 않음을 표창하니, 이것이 절개를 고집하는 방도다.[彰厥勁節 不移其所守 是固執之道也] …… 달이 그믐과 초하루, 차고 이지러짐에서 시간을 제대로 알려서 변역해도 그 노정을 결코 잃지 않는 것을 숭상하니, 이것이 시중의 도이다.[晦朔盈缺變易 不失其程 是時中之道也]”라고 하면서 늘 푸른 소나무와 일정하게 밝은 달을 한 몸의 성정(性情)으로 삼아 나의 행실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겠다는 선비의 양심을 강조하였다. 편액은 해서로 된 글씨와 행서로 된 글씨 두 개가 있는데, 이것은 해서로 된 편액이다.

경서를 읽은 반듯한 선비가 시를 읽지 않으면 답답해질 수 있다고 경계해왔다. 반듯한 해서 글씨는 해서로만 쓰면 답답해진다. 해서일수록 행초서를 품고 쓰고 초서일수록 해서를 품고 쓴다. 편액은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반듯한 해서체다. 행서를 품었다면 세 글자의 세로 길이도 이처럼 반듯하지 않을 것이며 세로획이 이처럼 나란히 같은 기세로 반복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로 잰 듯 정확한 것이 오히려 눈을 불편하게 한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영주 뒷새 진주강씨 소우종택(榮州 뒷새 晉州姜氏 小愚宗宅) 소개


봉화 전주이씨(全州李氏) 송월재종택은 태종대왕의 별자(別子, 제삼서자第三庶子 신빈신씨信嬪辛氏 소생)인 온녕군 정(程)의 후손이다. 온녕군은 아들이 없어서 아우인 근녕군 농(襛)의 아들인 우산군 종(踵)을 양자로 들여 여섯 아들을 두었다. 우산군의 여섯 아들은 모두가 당대의 명류들이었지만, 연산군 때 뜻밖의 화를 당하여 재산을 몰수당하고 결국에는 7부자가 같은 날 죽음을 맞았다. 이후 중종 때 그들에게 작위를 추증하여 억울함을 풀어주고 몰수한 가산을 다시 돌려주었다. 우산군의 7부자를 세칭 칠공자(七公子)라 한다.

경기에 터를 잡고 생활하던 온녕군 후손이 남쪽 지방으로 이사를 온 것은 추만(秋巒) 이영기(李榮基, 1583~1661) 때부터다. 그는 유년시절 정승인 유영경(柳永慶, 1550~1661)과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 1563~1628)에게 대성할 그릇이라고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임진왜란을 만나 부모를 여의고 백공(伯公)과 함께 이모 황씨에게 길러졌다. 이모 황씨는 이들이 외롭고 힘든 것을 안타깝게 여겨 굳이 공부를 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영기는 공부에 대한 열정이 남달라 어려운 가운데서도 노력하여 마침내 문사가 박달(博達)하게 되었다. 이후 이모가 풍기의 친정으로 부모를 뵈러 가자 이모와 함께 남행을 하여 외가에 의탁하다가 안동권씨(安東權氏)에게 장가를 들었다. 당시 안동권씨는 그 지역의 유수의 가문으로 이영기의 아내는 충재(沖齋) 권벌(權橃)의 증손 권래(權來)의 딸이었다. 봉화 지역에 세거하던 충재 집안과의 혼인은 낯설고 물설은 타향에 전주이씨 집안이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그의 심지를 알아본 재상 유영경이 음직(蔭職)으로 천거하자 이영기는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은 채 도를 즐기며 처사의 길을 택한 은거불사(隱居不仕)의 삶의 방식은 자식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영기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특히 넷째인 송월재 이시선은 호방한 기질을 타고나 한평생 시류를 따르지 않았고 특별한 스승 없이 독학으로 자신만의 학문 세계를 열어 나갔다.

이시선의 자는 자수(子修), 호는 송월재(松月齋),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부친은 이영기(李榮基), 모친은 안동권씨 충재(沖齋) 권벌(權橃)의 증손 권래(權來)의 딸이다. 1625년(인조 3) 외가인 봉화 유곡에서 태어났으며 유년 시절 문리를 터득한 이후 육경사자를 비롯한 제자백가, 지리, 복서, 성리서, 역사서 등을 일정한 스승 없이 독학으로 섭렵하였다. 이러한 자득정신은 그의 문장에도 반영되어 당시 유행하던 당송고문을 멀리하고 진한고문을 숭상하였다. 한편 그는 타고난 호방한 기질로 인해 명산대천을 두루 찾아 나섰는데, 그의 산수유람 취미는 상당 기간 지속되어 평양·개성·경주 등의 고도와 청량산·태백산·주왕산·금오산·속리산·삼각산·금강산·구월산 등의 명산, 그리고 동남 해안에 이르기까지 발자취가 미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 만년에 집 옆에 작은 서재를 짓고 송월재라고 하였다. 그는 타고난 건강에 힘입어 91세의 수명을 누리다가 1715년(숙종 41) 2월 17일 『중용』의 수장(首章)과 『주역』의 「건괘乾卦」를 외우면서 세상을 떠났다. 송월재 이시선은 일생 벼슬을 탐하지 않고 오로지 산림의 은사(隱士)로서 학문 탐구에만 전념한 선비로, 특히 자신의 담박한 삶을 가식 없이 그린 「청산사」라는 시가 인구에 널리 회자되었다.

청산은 예닐곱 길
집은 두세 칸
그 가운데 한 선비 있어
평생토록 글 짓고 또 지우네

송월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서재로 가운데 칸이 대청이고 양 옆 칸이 방인 정자 형태를 취한 건물이다. 앞 반 칸은 마루이다. 삼면에 퇴를 둘렀으며 앞면의 퇴는 계자난간을 두었다. 기단은 현재는 시멘트로 고쳐 놓았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작은 산등성이 사이 조그맣고 펑퍼짐한 골짜기 입구에 자리 잡았는데, 작은 도랑이 건물 옆을 흘러서 전체적으로 우거진 풀과 어우려져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참고문헌
  • 이지선, 「송월자전」 『송월재집』 권3.
  • 권진호, 「18세기 봉화지역 학자들의 학문경향-전주이씨가를 중심으로」, 『18세기 영남의 한 문학-봉화 지역을 중심으로』, 계명대학교 출판부, 2015.
  • 심경호, 「이시선, <송월자전>」, 『나는 어떤 사람인가』, 이가서, 2010.
  • 『편액』, 한국국학진흥원,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