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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첨재(無忝齋)

진성이씨 주촌문중(眞城李氏 周村門中)

43.3x83.3x5.7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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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무첨재(無忝齋)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43.3x83.3x5.7
  • 건물명 무첨재(無忝齋)
  • 공간명 광산김씨 유일재종택(光山金氏 惟一齋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안동시 와룡 가야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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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첨재(無忝齋)

무첨재(無忝齋)


무첨재(無忝齋)는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 물한리에 있는 진성이씨(眞城李氏) 가문의 재사 및 정사인 작산정사 및 가창재사(鵲山精舍-可倉齋舍)의 동편 구강당 서쪽 방에 걸려 있는 편액이다. ‘무첨’은 조상을 욕되게 하지 말아서 조상이 남긴 덕을 닦는다는 의미로 정성스럽게 조상을 섬기는 후손의 도리를 강조한 말이다. 『시경』, 「소아 소완小雅 小宛」 편에 “내 날로 매진하거든 너도 달로 매진하라.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서 너를 낳아 주신 분을 욕되게 하지 말라.[我日斯邁 而月斯征 夙興夜寐 無忝爾所生]”라는 대목과 『서경』, 「군아君牙」에 “지금 그대에게 당부하노니, 그대는 나를 도와 나의 다리와 팔과 심장과 허리가 되어 옛날에 하던 일을 이어 그대의 조고를 욕되게 하지 말라.[今命爾予翼 作股肱心膂 纘乃舊服 無忝祖考]”는 구절에서 인용하였다.

조심하고 경계하고 또 돌아보고 성찰하며 후손된 도리를 다하는 마음이 한 획 한 점에 투영된 듯 흐트러짐이 없다. 無에서 꿈틀거리는 필획은 안으로 뭉쳐 응축되었고 아래 4점은 3개로 줄여 반듯함과 절제미를 유지하였다. 첫 글자에서 절제가 오히려 위축으로 느꼈는지 忝에서 우측 파책을 길게 뽑아낸 점은 無자에 대한 반동으로 보인다. 앞 두 글자의 과정을 겪은 후 마지막 齋에서 원만한 마무리가 되었다. 기세도 당당하고 뻗어내림도 시원하며 움츠리거나 과한 점 없이 안정적으로 주변을 장악하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행과정을 따라가 보면 서사자의 감정변화는 저장된 기록처럼 되살아난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광산김씨 유일재종택(光山金氏 惟一齋宗宅) 소개


진성이씨는 시조 이석(李碩)의 후손이다. 이석은 대대로 경상도 진보현(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에 살았던 향리로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죽은 뒤 밀직부사로 임명되었으며, 이자수(李子脩)와 이자방(李子芳) 두 아들을 두었다. 이석의 맏아들 이자수는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이 통헌대부 판전의시사에 이르렀고 1363년(공민왕 12) 개경을 침략한 홍건적을 격퇴한 공로로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다. 이후 왜구의 침략을 피해 진보에서 안동 마애로 옮겼다가 만년에 다시 지금의 예안 두루(주촌 周村)로 옮기면서 두루마을 입향조가 되었다.

이자수의 손자 이정(李禎)은 뛰어난 무예로 세종 때 북방의 오랑캐를 격퇴하여 변경 지방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당시 건주위 추장 이만주(李萬住)가 변경을 위협하자, 이자수는 영변판관에 발탁되어 부사 조비형(曺備衡)을 도와 약산성(藥山城)을 축조하여 영변에 거진(巨鎭)을 설치하는 데 공적을 남겼고, 또 최윤덕(崔潤德)을 따라 모련위를 정벌하는 데도 공을 세웠다. 선산부사로 재직할 때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명망을 얻었다. 나아가 여섯 명의 딸을 남백경(南伯庚)·유봉수(柳鳳壽)·정보문(鄭普文)·이주(李疇)·박근손(朴謹孫)·권종(權悰)에게 출가시켜 폭넓은 혼맥을 형성함으로써 가문이 향촌사회에서 재지적 기반을 튼튼하게 하는데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정은 이우양(李遇陽)·이흥양(李興陽)·이계양(李繼陽, 1424~1488) 세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 이우양은 무과에 급제하여 인동현감을 역임하였으며 그대로 예안 두루에 살면서 진성이씨 주촌파를 형성하였고, 그의 후손들 역시 두루를 무대로 가문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둘째 이흥양은 증조부 이자수가 진보에서 처음 이거하였던 안동 마애로 옮겨 진성이씨 망천파를 형성하였다. 막내 이계양은 예안의 온계리에 정착하여 진성이씨 온혜파를 형성하여 재지적 기반을 확대해 나갔고, 그의 손자대에 와서 온계(溫溪) 이해(李瀣, 1496~1550)와 퇴계 이황이 출현함으로써 진성이씨 가문은 조선 최고의 명문으로 발돋움하였다.

작산정사 및 가창재사는 진성이씨 가문의 재사 및 정사로, 1980년 12월 30일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21호로 지정되었다. 작산정사는 1480년(성종 11) 송안군 이자수의 유덕을 추모하고 후손의 학문 연구를 위해 이황(李滉)의 조부 3형제가 창건하였으며, 가창재사는 이정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같은 해 함께 건립되었다. 안동시 북후면 물한리 89번지에 위치하는데, 이곳을 흔히 ‘절골’이라 부른다. 작산지라는 작은 저수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농로를 따라 마을에 접근해도 골짜기 앞을 가로막고 있는 솔숲 때문에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은밀한 곳이다. 절골에서 터 앞을 흐르는 물이 빠져 나가는 방향이 보이지 않도록 수구막이로 조성한 솔숲을 지나면 양지바른 산기슭이 나오고 언덕 여기저기에 큰 바위와 고목이 흩어져 있다. 그 사이사이로 고색창연한 집 다섯 채가 자리한다. 동쪽으로는 구강당과 주사로 들어가는 길이, 서쪽으로는 작산정사와 사당을 거쳐 가창재사로 오르는 길이 있다. 「중수기重修記」에 따르면 가창재사는 1480년 처음 지어진 이래 여러 번 중수를 하다가 누각을 새로 얹은 것은 1715년(숙종 41)에 와서다. 지금 같은 모습이 된 것은 아마 철종 때인 1862년(철종 13)쯤으로 추정된다. 그러니까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장장 200년에 걸쳐 지어진 건물이다. 무첨재가 있는 구강당은 기울기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이며 정면 5칸 중 가운데 3칸은 마루이다. 동쪽 방은 비해재(匪懈齋), 서쪽 방은 무첨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참고문헌
  • 정우락, 「영남의 큰집, 안동 퇴계 이황 종가」, 『경북의 종가문화』 5,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1.
  • 윤천근, 「작산정사 및 가창재사」, 디지털안동문화대전.
  • 설석규, 「온계 이해의 학문세계와 현실대응 자세」, 『온계선생종택복원낙성식』, 온계선생종택복원추진위원회, 2011.
  • 함성호, 「41, ‘진성 이씨의 정원’ 가창재사」, 동아일보, 2012년 3월 28일자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