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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건재(省愆齋)

진주강씨 법전 도은종택(晉州姜氏 法田 陶隱宗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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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성건재(省愆齋)
  • 글자체 행서(行書)
  • 크기 46.0x85.0x3.9
  • 건물명 성건재(省愆齋)
  • 공간명 봉화 법전 진주강씨 입재문중(奉化 法田 晉州姜氏 立齋門中)
  • 서예가
  • 위치정보 봉화군 법전 성잠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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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건재(省愆齋)

성건재(省愆齋)


성건재(省愆齋)는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의 진주강씨(晉州姜氏) 도은(陶隱)종택 우측 건물에 걸려 있던 편액이다. 도은(陶隱) 강각(姜恪)의 맏아들인 성건재(省愆齋) 강찬(姜酇, 1647~1729)의 당호이자 그의 호이기도 한데, 자신의 허물을 살핀다는 뜻으로 허물이 있으면 반드시 고치며 허물을 고친 뒤에는 두 번 다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강명규가 지은 「성건재기」를 살펴보면 허물을 적게 하고자 하고 후회할 일이 있으면 즉시 고치고 후회할 일이 없으면 살피고 또 살핀다는 의미이다. 또 중수 과정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강필경(姜必敬)이 1805년(순조 5)에 오래된 집을 허물고 새로 지으려고 하였으나 갑자기 죽어 그의 아들 강명규(姜命奎)가 아버지의 뜻을 이어 1841년(헌종 7)에 시작하여 1845년(헌종 11)에 완성하였다. 편액의 글씨는 1683년(숙종 9)에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에게 청탁하여 받은 해서체이다.

‘하나의 허물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도 좋지만 허물이 있을 때 대응하는 방식이 더 중요할 수 있다. 한 획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서사자의 자세는 숙연하다. 그러나 오차가 있을 때 어떻게 대응하여 다음 획을 처리할 것인가는 그 다음의 세계이다. 서법에서는 이와 같은 관점을 높이 사고 있다. 상대가 약하면 기세를 더해주고 강하면 기세를 덮어 주며 허물이 있으면 보완하고 부족함이 있으면 기대며 서로를 살리고 상대를 돋보이게 하는 관계를 최고로 여긴다. 오차란 오히려 일상사의 다반사이며 여기에 대응하는 일이 또한 일상사라는 점이다. 한 올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글씨가 빈틈이 없을 듯하지만 빈틈이 없으려고 애쓰는 마음이 글씨에 투영된다면 바로 그 점이 허물이 되기도 한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봉화 법전 진주강씨 입재문중(奉化 法田 晉州姜氏 立齋門中) 소개


강찬(姜酇)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진(子鎭), 호는 성건재(省愆齋), 아버지는 강각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 홍욱(洪勗)의 딸이다. 11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3세에 어머니마저 잃어 백부인 강흡(姜恰)에게 길러졌는데, 백부모를 친 부모처럼 모심에 백부 강흡이 “내 아우가 죽지 않았구나!”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태백오현의 한 사람인 포옹(抱翁) 정양(鄭瀁)에게 『소학』을 받아 깊이 체득하고 힘써 행하였다. 나중에는 명재(明齋) 윤증(尹拯)의 문인이 되었는데, 윤증이 칭찬하기를 “나이가 많은데도 강문(講問)을 그만두지 않고 조존성찰(操存省察)을 게을리 하지 않는구나!”라고 매우 감탄하며 칭찬을 그치지 않았다. 그는 효성스럽고 우애로우며 겸손하고 공손하며 자상하고 화락하였다. 양친을 일찍 여의고 늘 어버이를 사모하며 비통함에 스스로 죄인이라 일컬으며 부모님 말만 나오면 눈물을 흘렸다. 기제사가 있으면 보름 전부터 잔치에 가지 않았고, 제삿날에는 슬퍼함이 초상 때와 같이 조석으로 죽만 먹으며 떡과 과일을 먹지 않았다. 생일에도 슬픈 낯빛으로 좋아하지 않으면서 집안사람이 술과 음식을 차리면 물리치며 말하기를 “사람이 부모 없이 생일을 맞이하면 비통함을 배로 하라고 고인들이 일깨워 주었거늘 하물며 나 같은 사람은 천지간에 죄인이거늘 술과 음식을 차려 손님들을 모아 놓고 즐길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또 1727년에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자 “내 일찍이 부모님을 잃고 구차하게 세상을 살아가는데, 직분에 넘치는 직책을 내려졌다고 내 마음에 애통해 여기던 것을 어찌 이것 때문에 기뻐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노년에도 조상 묘소에 성묘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는데 자제들이 그만둘 것을 권하면 “내 나이 이미 늙어 제사에 참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거늘 거동할 만한 몸으로 어찌 빠질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강찬은 우리나라 제현들의 문적을 분류별로 모아 『현인문적賢人文蹟』 3권을 만들었다. 그의 문집 중 「서시아배書示兒輩」는 학문을 하다가 의문처가 있으면 지나치지 말고 반드시 자세히 살펴서 알아야 된다는 것과 밤을 새워가며 글을 읽으면 건강에 해로우니 적당한 수면을 취할 것 등 7개항을 지시한 글이다.

진주강씨 법전 문중의 세거지인 봉화군 법전면은 문수산과 태백산을 끼고 있는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안동부 춘양현에 편입되었다가 순흥부에 속하기도 하였다. 진주강씨가 법전에 터전을 마련하게 된 계기는 한산군수를 역임한 강덕서(姜德瑞, 1540~1614)의 후손인 강윤조(姜胤祖, 1568~1643)와 그의 두 아들 잠은(潛隱) 강흡(姜恰)과 도은 강각이 병자호란의 화를 피하기 위해 법전리로 입향하면서부터이다. 강흡과 강각은 부모님을 모시고 1636년(인조 14) 12월 파주 교하에서 출발하여 1637년(인조 15) 1월 매창(梅窓) 정사신(鄭士信)의 조카사위인 권산기(權山起)의 시골 농장이 있는 법전리 성재미[성잠星岑]에 우거(寓居)하였다. 법전 진주강씨는 음지마을과 양지마을로 나뉘어 마을의 토대를 형성하였는데, 양지마을에는 주로 소론으로 활동했던 강각의 후손들이 거주하였고, 음지마을에는 노론의 당색을 띠었던 강흡의 후손들이 거주하면서 명실상부한 진주강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양지마을에는 도은종택과 해은구택 등이 있으며, 음지마을에는 기헌고택과 경체정 등이 있다.

법전은 괴리 또는 유천이라고 하는데, 법전이라는 지명은 법흥사라는 사찰 앞에 있던 큰 밭을 지칭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으나 법전천의 옛 이름인 유계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즉 유(柳)자의 훈인 ‘버들’이 ‘법(法)’으로 변해 법계(法溪), 법전천(法田川)으로 변했다는 설명이다. 강흡과 강각 형제는 병자호란 이후에도 숭명배청의 대명의리를 실천하기 위하여 파주로 돌아가지 않고 법전에 정착하였다. 이들 형제는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 포옹(抱翁) 정양(鄭瀁), 각금당(覺今堂) 심장세(沈長世), 손우당(遜憂堂) 홍석(洪錫) 등과 함께 태백오현(太白五賢)으로 칭송되어 숭정처사(崇禎處士)로도 불렸다. 또한 강각은 태백오현에 더하여 태백육은(太白六隱)으로 일컬어졌고, 중국 동진 때의 시인 도잠 도연명의 ‘도(陶)’를 따서 ‘도은(陶隱)’이라 자호하였다. 남송을 인정하지 않아 조정에 출사하지 않은 채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어 놓고 은거했다는 도연명의 이야기는 버드나무를 신하의 충절에 빗대는 전통을 낳았다. 따라서 입향조인 강흡과 강각 형제가 견지했던 숭명배청의 의리가 도연명의 고사와 상통하여 법전천의 어원인 유계의 탄생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법전마을은 태백산을 향해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인 비룡승천형의 풍수지리학적 특성을 보인다. 여기에 법전면 풍정리와 봉성면 창평리 사이에 있는 갈방산과 가마봉이라는 두 개의 문필봉을 끼고 있어 문과 급제자 25명(음지마을 13명, 양지마을 12명), 무과 급제자 2명, 소과 합격자 31명과 고시 합격자 13명, 그리고 박사와 학자들을 대거 배출하여 영남의 명문가로서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성건재 건물은 강찬의 나이 29세 때인 1675년(숙종 1)에 지웠고, 1722년(경종 2)경 도은종택 우측에 온돌방 2칸과 대청 1칸으로 구성된 건물을 다시 지었다. 1860년(철종 11)에 도은 강각의 7대손인 유계 강명규가 중수하였으며, 1982년에는 후손들의 성금과 봉화군의 지원을 받아 중수하였다가 2016년에 다시 중수하였다.

참고문헌
  • 「행장行狀」, 『성건재선생유고省愆齋先生遺稿』 권4.
  • 진주강씨 법전문중 응교공 종회, 『진주강씨 번전문중지』, 2015.
  • 김정미, 『진주강씨 법전문중 도은종택 및 석당공』,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국학자료목록집 41,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