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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과(二果)

봉화 법전 진주강씨 해은공파(奉化 法田 晉州姜氏 海隱公派)

26.0x44.0x1.2 / 행서(行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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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이과(二果)
  • 글자체 행서(行書)
  • 크기 26.0x44.0x1.2
  • 건물명 이과(二果)
  • 공간명 광산김씨 후조당종가(光山金氏 後彫堂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예안 오천동-와룡면 군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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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과(二果)

이과(二果)


이과(二果)는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척곡리에 있는 진주강씨(晉州姜氏) 해은공파 문중에서 소장하던 편액이다. 강호(姜濩, 1836~1927)의 호이기도 한데, 『예기禮記』, 「내칙內則」에 “부모가 비록 돌아가셨으나, 장차 선한 일을 행할 적에는 부모에게 아름다운 명예를 끼침을 생각하여 반드시 결행할 것이요, 장차 선하지 않은 일을 행할 적에는 부모에게 부끄러운 욕을 끼침을 생각하여 반드시 결행하지 말아야 한다. [父母雖沒 將爲善 思貽父母令名 必果 將爲不善 思貽父母羞辱 必不果]”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소학』에도 해당 내용이 실려 있다. 편액의 글씨는 동곡(東谷) 조인승(曺寅承, 1842~1896)이 쓴 행서체(行書體)이다.

한 글자가 차지하는 공간의 범위를 내기(內氣)라 하고 글자와 글자 사이의 공간 범위를 외기(外氣)라 한다면(완당전집), 기존의 편액은 내기와 외기의 구분이 뚜렷하다. 내기는 최대한 축소, 치밀하게 하고 외기는 넉넉하게 했다. 이런 형식은 편액글씨에서 하나의 법이었다. 반면에 이 편액은 내기의 범위가 넓고 외기와의 구분이 모호하다. 오히려 내기 외기의 범위를 서로 공유하고 가장자리까지의 경계도 허물어 편액 화면 전체를 개방적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분명 이전의 편액 글씨와 다른 새로운 화면구성이다. 좌측의 낙관까지 그 공간점유에 대한 인식이 가득하다. 하나의 선을 그으면 공간은 둘로 만들어진다는 개념은 공간과 서법에 대한 새로운 지각이다. 그 결과 감상자의 시야는 한눈에 화면 전체를 조망하게 된다. 물리적 면적으로 보면 화면상 글씨의 면적보다 공간의 면적이 크지만 그 공간 전체가 무엇으로 가득 차 있으니 비어도 가득한 것이 되었다. ‘있는 것(有)’뿐만 아니라 ‘없는 것’(無)을 함께 보면 더 큰 묘한 경지를 볼 수 있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광산김씨 후조당종가(光山金氏 後彫堂宗宅) 소개


강호(姜濩)는 조선 후기 학자이자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차소(次韶)이다. 1890년(고종 27)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교리를 거쳐 통정대부에 올라 승지를 한 다음 1900년에 안동부사를 역임하였다. 남주(南洲) 조승기(趙承基)가 안동 임지로 가는 강호를 위해 쓴 「송강승선(호)지임안동서送姜承宣(濩)之任安東序」에서 안동은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풍속이 순박하여 영남에서 가장 다스리기 쉬운 곳이었으나, 지금은 순수하던 것이 경박해지고 질박하던 것이 꾸며져서 마치 거문고의 곡조가 고르지 못하는 것처럼 변하였으므로 안동에 가면 예전의 순박한 풍속을 회복시켜 줄 것을 당부하였다. 그리고 해은(海恩) 강필효(姜必孝)의 자상한 가르침을 입어 경전의 교훈을 복응하고 강습하였으므로 자신을 이루고 남을 이루어주는 방법에 대해 이미 학문과 벼슬을 통해 터득한 바가 있으므로 한나라 때 순리인 공수(龔遂)와 황패(黃霸)처럼 안동의 수령이 되어 선정을 베풀며 선비들의 학업을 진작시키고 향약(鄕約)을 회복하며 예전의 제도를 회복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진주강씨 법전 문중의 세거지인 봉화군 법전면은 문수산과 태백산을 끼고 있는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안동부 춘양현에 편입되었다가 순흥부에 속하기도 하였다. 진주강씨가 법전에 터전을 마련하게 된 계기는 한산군수를 역임한 강덕서(姜德瑞, 1540~1614)의 후손인 강윤조(姜胤祖, 1568~1643)와 그의 두 아들 잠은(潛隱) 강흡(姜恰)과 도은(陶隱) 강각(姜恪)이 병자호란의 화를 피하기 위해 법전리로 입향하면서부터이다. 강흡과 강각은 부모님을 모시고 1636년(인조 14) 12월 파주 교하에서 출발하여 1637년(인조 15) 1월 매창(梅窓) 정사신(鄭士信)의 조카사위인 권산기(權山起)의 시골 농장이 있는 법전리 성재미[성잠星岑]에 우거(寓居)하였다. 법전 진주강씨는 음지마을과 양지마을로 나뉘어 마을의 토대를 형성하였는데, 양지마을에는 주로 소론으로 활동했던 강각의 후손들이 거주하였고, 음지마을에는 노론의 당색을 띠었던 강흡의 후손들이 거주하면서 명실상부한 진주강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양지마을에는 도은종택과 해은구택 등이 있으며, 음지마을에는 기헌고택과 경체정 등이 있다.

법전은 괴리 또는 유천이라고 하는데, 법전이라는 지명은 법흥사라는 사찰 앞에 있던 큰 밭을 지칭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으나 법전천의 옛 이름인 유계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즉 유(柳)자의 훈인 ‘버들’이 ‘법(法)’으로 변해 법계(法溪), 법전천(法田川)으로 변했다는 설명이다. 강흡과 강각 형제는 병자호란 이후에도 숭명배청의 대명의리를 실천하기 위하여 파주로 돌아가지 않고 법전에 정착하였다. 이들 형제는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 포옹(抱翁) 정양(鄭瀁), 각금당(覺今堂) 심장세(沈長世), 손우당(遜憂堂) 홍석(洪錫) 등과 함께 태백오현(太白五賢)으로 칭송되어 숭정처사(崇禎處士)로도 불렸다. 또한 강각은 태백오현에 더하여 태백육은(太白六隱)으로 일컬어졌고, 중국 동진 때의 시인 도잠 도연명의 ‘도(陶)’를 따서 ‘도은(陶隱)’이라 자호하였다. 남송을 인정하지 않아 조정에 출사하지 않은 채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어 놓고 은거했다는 도연명의 이야기는 버드나무를 신하의 충절에 빗대는 전통을 낳았다. 따라서 입향조인 강흡과 강각 형제가 견지했던 숭명배청의 의리가 도연명의 고사와 상통하여 법전천의 어원인 유계의 탄생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법전마을은 태백산을 향해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인 비룡승천형의 풍수지리학적 특성을 보인다. 여기에 법전면 풍정리와 봉성면 창평리 사이에 있는 갈방산과 가마봉이라는 두 개의 문필봉을 끼고 있어 문과 급제자 25명(음지마을 13명, 양지마을 12명), 무과 급제자 2명, 소과 합격자 31명과 고시 합격자 13명, 그리고 박사와 학자들을 대거 배출하여 영남의 명문가로서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참고문헌
  • 조승기趙承基, 『남주선생문집南洲先生文集』
  • 진주강씨 법전문중 응교공 종회, 『진주강씨 번전문중지』, 2015.
  • 김정미, 『진주강씨 법전문중 도은종택 및 석당공』,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국학자료목록집 41, 2017.